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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원 종료 -
국민 혈세로 **하는 센티넬 가이드 규탄한다
참여 인원 : [ 628,405 명 ]
청원 내용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공무원이라는 꿈을 위해 4년째 청춘을 바치고 있는 수험생입니다. 하루에 10시간씩 시험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체력 학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꿈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공정'과 '상식'이 사라진 대한민국을 보며 큰 허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 좋게 이상 능력이 발현됐다는 이유로 공무원이 된 센티넬 가이드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공시생을 대표해 청원을 올립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부디 이 청원을 보시고 방재청 해체와 센티넬 가이드 의무 복무 폐지를 재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방재청의 시초는 지난 정부가 한일 수교 100주년이랍시고 맺은 한일 안보 협정이었죠. 힘 있는 나라가 무자비하게 힘을 남용하는 시대에 이웃 나라끼리 똘똘 뭉쳐 힘을 키워보자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국방부 직할 한일 센티넬군본부 신설하려다 역사를 다 잊은 거냐는 비판이 나오며 결국 행안부 산하 외청으로 신설되지 않았습니까. 이때부터 방재청의 역할이 굉장히 애매해졌습니다.
현재 방재청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재난관리인가요? 세금 먹튀인가요? 지금까지 센티넬과 가이드가 대체 어떤 성과를 냈는지요. 이상 능력이 발현됐다는 이유로 선택된 소수에게만 기회를 준다면 그들을 제대로 활용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는 일은 일반 공무직과 별다를 게 없는데다 그 이상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를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인 일인가요? 결론적으로 센티넬 가이드들이 국가를 지킨답시고 **하고 월급 받고 연금 받을 생각을 하니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 그런 일에 쓰여야 한다니요.
존경하는 대통령님, 부디 혈세로 **나 하는 놈들에게 세금 퍼주기보단 취업난에 허덕이는 자국 청년들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시길 간곡히 청원합니다.
[본 게시물의 일부 내용이 대국민 청원 요건에 위배되어 관리자에 의해 수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이 이번 달에 올라온 것 중 청원 수가 가장 많았다는 거죠?"
"네. 청원 글이 순식간에 커뮤니티로 퍼져나가 단시간에 참여 인원이 62만 명을 돌파한 것은 기록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맘에 안 든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단발머리를 쓸어 넘긴 대통령이 다시 청원 글을 읽다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글이 엉망진창이라 한참을 읽었네요. 요지는 이거네, 공무원인데 섹스도 하는 센티넬 가이드들 부러워 죽겠다는 말을 돌려쓴 거 아닙니까. 혈세 낭비? 어쩌라고요. 혈세로 섹스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감사한 일이죠. 지금 경찰청에서 사이버범죄 잡는다고 AI 하나 돌릴 때마다 돈이 얼마입니까. 데이터센터 지어야 하지, 그건 뭐 공짜로 돌아가요? 요새는 탈원전 눈치 보이니 친환경 발전소 지어야 하는데. 수도권에 짓는다 치면 땅값 비싸지, 지방에 지으면 거기 반발은 또 어떡합니까. 그거 또 달랜다고 인프라 만들고... 그 시간, 비용 따지고 보면 그냥 섹스시키는 게 훨씬 이득이에요. 이 얼마나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입니까. 섹스는 공짜예요! 공짜!! 어쨌든 지금 방재청 이미지가 안 좋다는 거잖아요. 이미지 메이킹 좀 하게끔 대책 좀 세워서 다음 주까지 보고 딱딱. 알았어요?"
그리하여 세상에서 제일 알아주는 광고 회사, 한국대 사회학과 교수, 고양이유괴단 등등 대한민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은 다 불러놓은 결과 채택된 것은 대형 엔터테인먼트 3사에서 일해온 아이돌 디렉터의 보고서였다.
"섹스가 나쁘다, 문란하다는 인식을 바꾸는 일. 몇백 년간 유교를 믿어온 한국 사회에서 가당키나 할까요? 단언컨대 절대 못 바꿉니다. 그러니 역 이용하는 거죠. 인식을 바꿀 수 없다면 원하게 하라. 단순히 욕망을 일으키는 섹스어필에서 더 나아가 센티넬과 가이드를 섹스 '시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뭐, 아이디어는 기발한데... 유 디렉터는 그걸 대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태초에 유느님이 망붕을 창시하시니라, 대한민국 방송계는 밥 짓는 아저씨들까지도 엮어내는 열림교회 닫힘 같은 곳이었으니...
***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세종청사 방재청
유 디렉터님의 발표가 끝났습니다. PPT를 요약하자면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센티넬과 가이드의 문란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귀엽고 순수한 아이돌 콘셉트로 홍보팀을 만들어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센티넬과 가이드는 그 홍보팀에 소속된다는 얘기였죠.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요한 틈으로 누군가 '흑'과 '흫' 사이의 가냘픈 호흡 소리를 내뱉었습니다. 그것은 헛웃음이 나올 때 뱉는 숨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온갖 서러움과 핍박 끝에 결실을 맺어 감격스레 터져 나온 소리에 가까웠죠. 저는 누가 그런 불경한 소리를 내었는지 빠르게 주위를 살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우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죠. 그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눈물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저는 유우시가 우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유우시는 또 다시 '흐흑' 소리를 내며 주변의 관심을 끌었고. 마침내 모두의 시선이 본인에게 꽂혔을 땐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 주셔서 흐흑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곧 하나둘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요.
네... 저는 그렇게 국민이 안전하길 소망한다는 뜻을 담은 대한민국 방재청 재난안전대응국 한일 합동 센티넬가이드 홍보팀 NCT(National Catastrophe Team, 국가재난팀) WISH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듯, 사람을 구하고 재난을 막는 센티넬과 가이드도 마땅히 지켜야 할 직업윤리가 있단 말입니다. 노래로 혼문 만드는 헌트릭스도 아니고 제가 노래 부른다고 사람이 저절로 구해지나요? 정말이지, 대한민국은 충주맨을 탄생시킨 나라답네요.
저는요, 진심으로 그런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 눈 한번 딱 감고 소신 발언을 하기 위해 손을 들었는데 말이죠. 대통령께서 유우시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마디를 덧붙이시네요.
"센티넬과 가이드라면 잘 아는 대사가 있죠?"
"......"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
"저는 우리 센티넬 가이드 대원들이 책임과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랄! 그럼 난 어떡하라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한국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지.
-박명수-
힘. 그 힘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1999년. 전 세계는 다가올 뉴밀레니엄에 대해 말이 많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종말론을 비롯하여... 그러나 새해가 밝고 새천년이 왔지만, 세상은 그대로였다. 고 생각했으나 뉴밀레니엄에 태어난 아이들이 2차 성징을 겪을 때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불특정 아이들에게서 이상 능력이 발현된 것이다. 지구 곳곳에서 어린 센티넬과 가이드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현재는 21세기. 인권이 존재하는 한 그들을 무슨 수로 묶어둘 텐가. 이 무슨 링컨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 때마침 그 해에 앤드류 가필드가 스파이더맨 영화를 찍었더랬다. 사람들은 그 어린 센티넬과 가이드의 머리가 더 굵어지기 전에 공산당식 세뇌 교육을 시켰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처럼. 사명감이라는 뽕을 대가리에 심어놓았다. 그러나 사실상 그 속내를 파악해보면 '위험한 힘을 가졌으니, 엄한데 쓰지 말고 국가에 바쳐라'와 다름없지만 말이다. 거기에 더해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별종 취급하고 멸시하는 내려치기는 덤으로. 솔직히 말이 이상 능력이지 만약 내가 C급 화염계 센티넬이다? 기껏해야 선배들 담배 피울 때마다 따라 가나 손가락 튕겨 담뱃불 셔틀 하는 게 전부인데... 이런 괴물, 돌연변이, 잠재적 테러리스트, 섹스나 하는 문란한 새끼 취급은 정말 서럽다. 그러니 저렇게 미쳐 도는 유우시 같은 애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 유우시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발현 직후 센터 내에서 제2의 오시온으로 촉망받다 하루아침에 오시온의 낙하산으로 강등당한 비운의 센티넬. 지하 연습실에 갇혀 사회성을 제때 배우지 못한 장기 찐따 연습생. 그 외에도 전화기 공익. 침묵의 관심종자 등등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른마흔다섯개인 온갖 소문이 건국 설화처럼 전해 내려오는 전설의 센티넬이라고 볼 수 있다.
유우시는 전 국민이 아는 센티넬인 '그' 오시온과 함께 아이돌 데뷔조였다는 소문이 돌며 입소 전부터 기대치가 컸다. 타고난 운동 신경으로 기초 체력 훈련 모두 만점 받았으나, 센티넬 능력 검사에서 C등급이 나오며 그에 대한 평가는 떡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발현한 능력은 어디 써먹기도 애매한 디펜스 계열. 하늘색을 띠는 실드 장벽을 만들 수 있으나 그 범위가 본인을 제외하고는 넓어지지 않았으며, 유지 시간도 굉장히 짧아서 반응속도가 탈인간급으로 빠르지 않다면 탱커로도 쓸 수 없는 그런 능력치. 저딴 능력치를 가졌으니 당연하게도 본인은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가 꿈꾸던 아이돌 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유우시를 절대로 놔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한국 정부는 유우시를 내보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무쓸모의 센티넬을 떠맡게 된 셈이다. 국장실에서 퇴소하고 싶다고 울어서 훈련 중인 오시온이 호출 당해 며칠을 달래준 폐급애기썰은 ‘너는 그렇게는 살면 안 돼 알았지?’ 라는 말과 함께 선배들로부터 신입들에게 교육용 자료로 전해졌다. 능력이 안 되니 현장 부서는 당연히 못 가고 행정 부서로 뺐더니만 에... 전화? 전화를 제가? 어떻게 받아요? 컴퓨터 공익짓하는 게 소문이 나, 각 부서에서 서로 안 받겠다 난리치는 바람에 소외되던 걸 오시온이 혼자 옆에 끼고 살며 챙겼더랬다. 저걸 내쫓을 수도 없고 품기도 뭐한 찰나에 타이밍 좋게 유우시의, 유우시에 의한, 유우시를 위한 프로젝트가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NCT WISH 프로젝트 되시겠다.
일은 못 하는데 애는 착해 VS 싸가지 없는데 일은 잘해
밸런스 게임을 해보자. 당신은 직장 동료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벌써 가이드 밥만 7년 넘게 먹어온 나로선 후자를 선택하겠다. 하지만 유우시가 제3의 선택지라면? '능력도 없는데 사회성도 없어' 라면? 당신이라면 같이 일을 하고 싶은가? 유우시라는 인간은 지하연습실에 갇혀 춤추고 노래하는 것만 배웠지,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생활은 경험해 보지 못 한 것 같지 않다. 하긴 똥군기 아니면 나데나데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배운 사회성으로 정상적 사고를 하길 바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유우시는 대체로 귀를 닫고 사는지 사람이 말하면 꼭 한 번씩 되묻는다. 입에 발린 소리는 못 해 입을 꾹 다문다. 헛소문으로 오해받아도 해명 하나 할 줄 모른다. 원하는 게 있어도 제대로 의사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제 맘을 독심술 해줄 때까지 수줍게 웃어 보인다.
누나들로부터 네모의꿈 조기교육 받고 호텔 청소 알바하며 이모님들께 예쁨받는 법 깨우친 나에겐 유우시는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다소 답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가 나의 인생까지 스며드는 걸 가만두고 봐야 한다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어찌 되었든 유우시의 본분은 센티넬. 싫든 좋든 센티넬이 된 이상 어떻게든 적응하며 지내야 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뭔, 아이돌? NCT? 그게뭔데씹덕아...같은 기획 때문에 애가 헛바람이 들어 마치 아이돌이 된 것처럼 날아다니는 게 영 꼴 보기가 싫다. 안 그래도 인권씹창 되어가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명예에 똥칠하는 것 같,
"리쿠, 다 썼어? 이제 녹음 들어간다는데."
아 맞다. 나는 지금 내일 있을 잡지 인터뷰를 위해 질문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생각이 길어졌군.
리쿠에게 시온이란 [의지할 수 있는 부 리더] 다.
리쿠에게 유우시란 [ ] 다.
리쿠에게 재희란 [내 뒤를 맡길 수 있는 후배] 다.
"쓰읍..."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
생각나는 대로 쓰라고...
리쿠에게 유우시란 [엮이고 싶지 않은 폐급 후배] 다.
라고 쓸 수는 없어서 나는 다른 팀원들이 쓴 것들을 커닝했다. 애기 1호, 알고 보면 다정한 선배, 세상에서 가장 동경하는 형, 냥냥이.
냥냥이?는 대체 뭐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우시에게로 눈길이 갔다. 그는 열심히 버블티를 휘젓고 있다. 뭔가 유우시 형 먹을 때 귀엽게 먹지 않아? 료는 그런 그의 옆에서 모에화를 시작한다. 사레들린 유우시가 쿨럭대자 사쿠야는 그의 옆에 찰밥처럼 찰싹 달라붙어 앉아 낄낄거리며 조롱하고 있다. 방금까지 내 옆에 있던 시온 선배마저 유우시 쪽으로 다가가더니 귀엽다는 듯 유우시의 머리를 헝클이며 자연스럽게 방금까지 유우시가 빨던 빨대로 버블티를 뺏어 먹는다.
그러니까 난... 이런 분위기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이 NCT인지 뭔지 하는 그뭔씹 콘셉트가. 하루아침에 직장동료와 아이돌 소꿉놀이를 하라는데 니 같으면 적응이 되겠냐? 국장한테 따지고 싶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나를 제외하고 다들 이런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이해심을 십분 발휘하자면 저들이 스킨십에 거부감이 없는 센티넬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역시 같은 가이드인 대영뿐인 걸까? 나는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대영을 봤지만, 대영도 유우시를 보고 아니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귀엽다는 듯이 웃고 있길래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NCT WISH의 첫 번째 싱글 앨범 '가스 안전 예방 3분까진 필요 없어' 녹음 하러 도망갔다.
***
"리쿠 씨, 힘들죠? 잠깐만 쉬고 다시 갈게요."
가스 밸브 확인하라는 가사를 대체 어떻게 The Kid LAROI처럼 부르란 거야... 통곡의 벽을 느끼며 멍때리고 있는데 셀프캠을 든 유우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오. 오늘은 '가스 안전 예방 3분까진 필요 없어' 녹음 날입니다. 녹음이 끝나면 안무 연습을 하러 가야 되는데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존나 야렸는데도 굳이 많은 빈자리 중에 내 옆에 앉아 카메라를 들이댔다.
"어...... 녹음실에 리쿠가 먼저 와있네요. 리쿠 형, 안무는 다 외웠어요?"
"......"
"아~ 안무가 조금 어렵지요? 저도 겨우 외웠어요. 여러분도 궁금하지요? 조금 보여드릴까요?"
딴딴딴. 딴딴딴. 카메라를 세워두고는 안무 시늉을 하는 본인을 셀프로 찍는 모습에 기가 차 말도 안 나온다.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가사를 중얼중얼 외우는데 옆에서 쫑알거리면서 집중을 방해 하더니 먼저 녹음을 하러 쑥 들어간다. 방금까지도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쫑알대던 녀석이 마이크 앞에 서자 Justin Bieber처럼 노래를 부른다. 열심히 손을 까딱거리며. 저 목소리는 손가락 지휘에서 나오는 건가. 1트만에 완벽하다는 칭찬을 받으며 녹음실에서 나오는 녀석을 보자 자존감이 떨어졌다. 자신 없는 상태로 녹음실 들어갔더니 결국 들은 소리는 우시가 리쿠 좀 봐줄래? 였다. 그리하여 유우시는 나의 직속 속성 과외선생이 되었다. 랩부터 안무 레슨까지.
솔직히 연습실의 유우시는 센터에서 지나가며 보던 모습과는 정반대다. 평소에는 입도 벙긋 안 하는 주제에 중앙에 서서 연습을 이끌어 나간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운이 빠져있을 때 웃긴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쳐서 분위기를 바꾼다거나. 땀에 쩐 채 멍을 때리고 있다가도 혼자 거울 앞에서 안무 연습을 하는 유우시를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센티넬이 뭐라고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가 센터에 처박혀 있는 건지. 그리고 대체 나는 뭐 한다고 여기서 팔자에도 없는 아이돌 체험을 하고 있는지.
"아아~ 몰라! 나 못 하겠어. 안 할래. 나 안 해!"
유우시 따라가다 결국 가랑이 찢어질 판이다. 나 마에다 리쿠, 웬만하면 뭐든 평타는 쳤던 상타치의 남자였는데 자존심이 상한다. 난 아이돌이 아닌데, 가이드가 왜 춤을 춰야 하는데... 답답한 마음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고 싶은 일도, 잘하는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따라가 보겠다고 노력하는데도 재미는커녕 현타만 느껴져서. 싫어도 내 업무이니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뚱어리가 따라주지를 않는다. 짜증나고, 속상하고, 미안하고... 어느새 다가온 유우시가 손을 내밀었다. 의아하지만 일단 손을 잡았다.
"리쿠, 일어나. 여기서 리쿠가 제일 못하는 데 벌써 지치면 어떻게 해. ^_^"
미안하다는 말은 취소다. 역시 이 새끼는 인성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다. 유우시의 손을 쳐내고 일어났다. 열이 뻗쳐서 오늘 안무는 다 익히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연습실에서 남은 체력을 다 태웠다. 모두가 떠나고 유우시와 둘만 남은 연습실. 관사까지 갈 체력도 없어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워있는데 유우시가 은근슬쩍 다가오더니 엉덩이를 내 쪽으로 붙이며 앉는다. 좋은 말 할 때 그냥 가라... 그러나 밀어낼 힘도 없어 나는 그냥 유우시를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잠시 눈만 감는다는 게 잠이 들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일으키자, 안무실 바닥으로 쿵 하고 유우시의 머리가 떨어졌다. 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유우시가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침에 가까운 새벽. 오늘 비번이라 다행이다. 안도감과 동시에 열심히 뒤통수를 부비며 아픔을 호소하는 유우시를 보니 괘씸한 마음이 든다. 사람이 자면 깨울 생각을 해야지 베개 삼아 자는 게 제정신인가. 역시 친해질 부류가 아니다. 얼른 관사 가서 씻을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자 유우시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뭐."
"아파..."
내 잘못도 없지는 않으니 다 터진 반곱슬 머리카락 사이로 혹이 난 것 같은 뒤통수를 문질러주자 혼자 툴툴거린다. 한 모금 남은 물을 탈탈 털어 마시고는 연습실을 나가려는데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한다. 리쿠 잘해. 아까 춤... 이거였어. 하고는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고는 무엇이 웃기는지 또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죽여 웃는다. 이것도 칭찬이라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내가 이 정도로 인정 욕구가 강했나. 의식적으로 표정을 팍 구기며 관사로 향했다.
***
유튜브에 <가스 안전 예방 3분까진 필요 없어> 뮤직비디오가 올라왔다. 그동안 방재청TV 계정에 올라온 영상 중 조회 수 많아봤자 4.6천 따리였는데 올라온 지 몇 시간 만에 20만 뷰 찍었다. 댓글 창엔 대체로 지랄한다, 세금 낭비 거하게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러나 대통령 빽으로 광고 도배해 여기저기 이슈가 되더니 선플도 달리기 시작했다. 날개 붙은 별 니삭스 신으며 밀어붙인 안전 지키는 순수한 큐피드 콘셉트가 통한 모양이라며 청장은 주간 보고 회의에서 자화자찬 했더란다. 나는 NCT팀 리더라는 이유로 유우시를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다음 주에 뮤직뱅크에서 특별 출연 제안이 왔어요. 홍보팀은 안무만 좀 신경 써주시고..."
뮤직뱅크라는 단어에 유우시의 눈이 반짝거린다. 흥미가 없는 나는 유 디렉터의 월간 보고를 한 귀로 흘리며 회의용 태블릿으로 뮤직비디오에 달린 댓글을 훑었다. 반응이 궁금했는지 유우시가 내 쪽으로 붙으며 태블릿을 흘깃거린다.
@햇반 · 15시간 전
얘네도 가이딩이라는 걸 할까?
└ 안 하겠지... 춤, 노래, 국민 안전밖에 모르는 순수한 아이들인데
나는 10분 전까지 가이딩 룸에서 발전소뺑이 돌고 온 전력팀 센티넬에게 좆을 빨리고 있었다.
뮤비를 끄자 알고리즘을 타고 이런 쇼츠가 떴다.
유우시가 데뷔 1개월 차에 이룬 것들
라면 먹방 5회
같은 말 반복하기 13회
혼자 구석에 숨어있기 8회
맛있는 거 먹고 우마이 댄스 추기 11회
리쿠 쳐다보고 안 본 척하기 2876629975번
걍 내가 하도 갈궈대서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유우시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 반성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정독했다.
@우유맛 버블티 · 4일 전
말도안되,, 나의 씹천사 우유쨩이 비처녀라니,,,
@aoqtbffod · 6일 전
얘네를 보면 배 맞춘 사람들 특유의 미묘한 기류가 보임 ㅋㅋ
@냥냥치킨 · 6일 전
가삼필 녹음 비하인드 자컨 때 녹음실에서 둘이 ㄹㅇ 개어색했는데 내 생각엔 그때 처음 한 듯;;
└ 가이딩 룸에선 자컨 안 찍냐 국가가 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 안 함?
└ 근데 리쿠 가이딩 할 때 어케 해...? 박는 거야 박히는 거야?
└└ 얘, 넌 폰 충전할 때 충전기가 박니 박히니? 우리 기본 상식은 좀 갖추자.
당황스러운 댓글에 나는 옆을 돌아봤다. 얼굴이 새빨개진 유우시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딸꾹! 나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넌 왜 분위기 이상하게 딸꾹질까지 하고 난리니. 나는 앞에 놓인 생수 뚜껑을 따서 유우시에게 내밀었다. 유우시가 급하게 물을 들이켰지만 딸꾹질은 멈추지 않고 결국 회의 내내 자꾸만 몸을 움찔거렸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유 디렉터는 유우시를 따로 붙잡았다.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거기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서둘러 빠져나온 나는 어쩐지 충전기를 꼽는 것이 불미스럽게 느껴져 곧장 온라인으로 무선 충전기를 주문했다.
순수? 큐피드? 콘셉트가 먹히긴 개뿔. 이제 세상은 우리를 영웅 취급해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이딩을 빙자한 욕망 가득한 섹스를 시키기 위해 안달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난 그저 내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 와중에 박 주무관이 방재청TV에 릴스 업로드 해야 하니까 유우시랑 둘이 안전 수칙 캐치캐치 챌린지 찍으라고 메신저를 보내왔다. 현타가 왔어도 본성은 착실한 공무원이라 나도 모르게 캐치캐치 챌린지가 뭔지 검색하고 눈으로 안무를 따고 있었다. 하... 번아웃 올 것 같아.
***
혀를 뽑아댈 기세로 가이딩을 쭉쭉 빨아대던 시온 선배가 입술을 뗐다. 화재 현장 갔다 왔다더니 내 몸까지 매캐한 연기 냄새가 밴 것 같았다. 혀뿌리가 얼얼해 괜히 볼 안쪽을 훑으며 혀를 풀었다. 혀에 쥐날 뻔했네. 현재 가이딩 수치는 87%. 안정된 수치를 확인한 시온 선배는 침과 피로 범벅된 입술을 손등으로 쓱 훑으며 떨어졌다. 찢어졌던 눈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하게 재생됐다.
"미안. 좀 급했다. 괜찮지?"
"언젠 안 그랬어요?"
"글킨해."
시온 선배가 큭큭 웃으며 시계를 확인한다. 몇 시간 뒤엔 방재청 투어 홍보영상 촬영이 있었다. 방금까지도 현장 돌고 왔는데 얄짤없다.
"방사 해줄게요. 조금만 누워있어요. 어제도 늦게까지 스케줄 있었잖아요. 원래였음 비번이었을 텐데."
"리더님이 고생했지, 나야 뭐."
그러면서도 옆 침대에 눕는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그대로 호흡이 느려진다. 나도 잠시만 눈 좀 붙일까 하는 데 시온 선배가 뒤척이면서 말을 걸어왔다.
"리쿠야, 근데 유우시 너무 싫어하지는 마. 센터에서 애들한테 미운털 박힌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 이제 같은 팀이잖아."
"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냥, 애가 좀 어리게 구니까..."
"걔가 그래 보여도 알고 보면 속이 깊어, 책임감도 있고. 난 오래 봤잖아. 유유시 처음 봤을 땐 진짜 애기였는데. 키도 내 가슴까지 왔었나?"
시온 선배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어간다.
"그래도 요즘은 다 컸어. 나한테 한 번도 그런 거 물어본 적 없는데, 저번엔 형은 가이딩 받을 때 어떠냐고 묻더라? 쪼꼬만 게. 하긴, 뭐 현장을 나가봤어야 가이딩을 받아보지. 웃겨가지고 왜~ 너 가이딩 받고 싶어? 물어보니까 얼굴 빨개져서 고개 절레절레 흔들더라. 아하~니 귀여워서 장난 좀 쳤거든? 네 얘기 꺼내면서 가이딩은 리쿠가 제일 잘 해준다고?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더니 너 키스 잘하냐고 물어보던데?"
"예? 뭘요?!"
"어우야, 리쿠. 나 벌써 92퍼다. 먼저 간다. 더 쉬든가."
가이딩 룸을 빠져나가다 말고 시온 선배가 덧붙인다. 어쩐지 끈적한 윙크와 함께.
"아, 우시한텐 최악의 키스라고 해줬어. 절대 하지 말라고."
***
"우리 NCT WISH 멤버들!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의외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멤버들이 봤을 때 가장 귀여운 멤버는 누구인가요?"
뮤직뱅크 로고가 박힌 큐카드를 또박또박 읽은 MC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나는 널 위해 펼친 판이니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하는 심정으로 유우시를 지목했지만 다른 멤버들까지 전부 유우시를 꼽을 줄은 몰랐다. 결과를 확인한 시온 선배가 유우시를 놀리기 시작한다. 유우시 애교는 타고났죠 그냥. 유우시는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웃을 뿐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오~ 유우시 씨가 만장일치로 멤버들의 선택을 받았는데요. 시온 씨가 말한 타고난 애교 한번 시청자분들께 보여줄 수 있을까요?"
카메라가 줌을 당기자 화면에 유우시가 한가득 담긴다. 유우시가 평소보다 톤을 올린 목소리로 떠듬떠듬 프롬프터 속 대본을 읽기 시작한다.
"여러분~ 위시의 귀요미. 유우시가 하는 애교. 보실 준비. 되셨나요?"
원샷을 받은 유우시는 수줍게 양 뺨을 부여잡고 애교랍시고 마인크래프트 좀비 성대모사를 했다. 크르르르... 순간의 침묵을 깨고 박수와 함께 MC들의 억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위시에서 가장 귀여운 유우시 씨부터 옆에 서 있는 멤버들의 장점 하나씩 꼽아볼까요?"
내가 왜 유우시의 왼쪽에 섰을까. 어쩐지 기분이 들뜬 유우시는 내 어깨 뒤에 숨어 혼자 히히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카메라 옆 작가님이 빨리 멘트를 하라고 손짓하자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하는 말이 가관이다.
"우리 리쿠는요, 가이딩을 제일 잘해요."
아 그런 거 말고~ 시온 선배를 따라 멤버들이 와하하 박장대소를 하며 차례가 넘어간다. 내가 료의 어떤 점을 칭찬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촬영이 끝나고 혼란한 틈을 타 유우시를 데리고 나왔다. 방송국엔 어딜 가나 사람이 있어서 피하려다 보니 구석진 비상계단까지 와버렸다.
"너 오늘 뭐 잘 못 먹었어?"
"나? 리쿠랑 똑같은 거 먹었는데... 치킨하고 쌀밥."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붙고, 쳐다보고. 평소랑 다른 짓을 하지? 아까 뭐랬더라. 가이딩을 내가 제일 잘 해? 너 댓글 봐서 알잖아. 사람들이 너랑 나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그런데 거기에 대고 가이딩을 잘한다니 그런 말을 하면 또 뭐라고 떠들어대겠냐고. 그리고 너 나한테 가이딩 받아보지도 않았잖아."
"그건 리쿠가 센터에서 등급이 제일 높으니까."
"니가 말하면 그런 의도로 들리지 않아."
눈을 세모나게 뜨고는 나를 새침하게 쏘아본다. 볼에 바람을 넣었다가 입술을 모았다가 할 말이 많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난 리쿠랑 안 친하니까 리쿠가 뭘 잘하는지 몰라."
"방송용으로 대충 지어내면 됐잖아."
"...디렉터님이 리쿠랑 친하게 지내랬어. 방송에서도 친한 티 좀 내고."
"......"
"스킨십 같은 것도 하면 팬들이 좋아할 거라고..."
허,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 없잖아. 솔직히 난 이 홍보팀 활동도 잠깐이니까 하는 거야. 네가 원하는 그런 모습에 협조해 줄 생각도 없고."
"......미안. 불편하면 이제 안 그럴게."
사과를 해놓고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을 피한다. 왜 지가 잘못해 놓고 지가 삐지는 거지? 유우시만 보면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이대로 올라가서 다른 팀원들까지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그냥 일하는 동료끼리 서로 배려해서 적당히 맞춰주면 될 일 아닌가?
"왜, 왜, 말해봐. 대체 뭐가 맘에 안 드는데."
"보면 리쿠는 유독 나한테만 차갑게 구는 것 같아. 나는 그냥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솔직히 얘기해서, 내가 너랑 친해지고 싶을 것 같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나 현장 뛰기도 바쁜데 지금 서울까지 올라와서 인터뷰니, 음방이니 찍고 있는데 너 같으면 좋을 것 같냐고."
"......"
"료나 사쿠야처럼 지원한 애들도 있지만, 너도 알잖아. 난 강제로 차출당한 거."
원망 가득한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하다. 잘하고 싶겠지. 인정받고 싶겠지. 근데 너를 위해 내가 이용당하는 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더는 내 인생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덜 상처받을까.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는데,
"유우시!! 우시야!!!!"
타이밍 좋게 유우시를 찾는 시온 선배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유우시가 위로 고개를 들어 시온 선배를 찾는다. 동시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툭 흘러내린다. 나랑 얘기하다 말고 어딜 가려고. 분명 시온 선배는 또 오냐오냐 유우시 편을 들어줄 게 뻔하다. 유우시는 시온 선배 뒤에 숨어 내가 했던 말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겠지. 괘씸한 마음에 유우시의 손목을 붙잡고 계단 아래로 몸을 숨겼다.
"나랑 얘기하고 있잖아."
"나는 더 할 말 없어."
"그러면 이러고 간다고? 가서 다른 팀원들한텐 뭐라고 말할 건데."
"사과했잖아. 미안하다고. 앞으로 안 그럴게. 이제 리쿠한테 친하게 지내자고도 안 할게."
"말을 왜 또 그렇게 해. 이해 좀 해달라고. 내가 왜 너랑 엮이고 싶지 않은지를..."
나도 모르게 유우시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우시는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애쓰며 계단 위쪽을 흘끗거린다. 무성의한 사과와 믿을 구석을 찾는 태도.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우시야 여기서 뭐해. 팬들이 지금 너 보여달라고 찾,"
"......"
"...리쿠도 있었네."
누가 봐도 운 사람과 화내는 사람. 우리는 계단 아래 구석에서 싸우다 만 모양새로 시온 선배에게 적발되고 말았다. 하필 릴레이 라이브를 켜고 있던 중이라 실시간으로 우리의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고... 그렇게 유우시와 나는 세종 센터로 복귀하자마자 국장실로 불려 갔다.
***
결국 나란히 징계받았다. 경위서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더니 국장은 우리더러 친해지라며 가못방에 가뒀다. 대부분의 가이드는 가이딩 룸을 가못방이라고 부르고는 한다. 가이딩이 완전히 될 때까지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센티넬이 가이딩을 거부하며 폭주하는 경우를 대비해 폭주하더라도 해당 센티넬과 가이드만 죽을 수 있게 그런 인권 말살적인 감금 장치가 생겨났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유우시의 가이딩 수치가 100이 될 때까지 이 방 안에서 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가못방이라 부른다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음흉한 상상을 할까 봐 설명하자면, 가이딩 룸 안은 평범한 의료실과 다름없다. 멸균된 공간 한 쪽엔 혹시 모를 폭주를 대비해 언제든 꽂아 넣을 수 있도록 주사형 가이딩 약물이 나란히 놓여있고. 위급 시를 대비해 신체 결박용 벨크로가 늘어진 의료용 침대 두 개와 구급상자가 전부다. C등급인 유우시는 가이딩 룸까지 들어올 일이 없었으니 이 섬뜩한 분위기에 다소 쫄린 게 티가 났다. 우리는 양 벽에 붙어있는 의료용 침대에 떨어져 앉았다.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현재 유우시의 가이딩 수치는 37. 스트레스 받았는지 수치가 평소보다 낮다. 얜 가이딩 용량이 코딱지만 한 C등급이니 100까지 충전하려면 대략 목조르기 10분, 뺨싸대기 때리기 10000000회, 두 손 맞잡고 그랬구나 7분, 쎄쎄쎄 푸른 하늘 은하수 500번, 악수 12분, 포옹 6분, 키스 2분, 성기 삽입 30초 정도면 완충될 것이다. 우리 사이에 가장 적절한 가이딩 방식은 악수 12분 정도겠거니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린다. 그러나 침만 꼴깍거리면서 긴장한 애를 두고 가이딩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싫은 티를 팍팍 내는 나의 행동에 눈치가 보였는지 유우시가 나를 흘겨본다. 이내 코 먹는 소리가 나더니 옷소매를 끌어내리고는 눈물을 톡톡 찍어냈다.
"리쿠, 나랑 친해지기도 싫어하는데 나한테 가이딩하기 싫지? 못 하겠지?"
"싫고 말고가 어디 있어. 해야 하면 하는 거지. 가능은 해. 당연히 가능, 가능이냐고 물어보는 거면 가능하다고."
"아니. 리쿠 마음. 리쿠 마음이 중요해. 나한테 가이딩하고 싶어?"
"무슨 소리야. 빨리 가이딩하자니까."
"나랑 가이딩하고 싶은 거야?"
"...가이딩을 안 하면 여기서 못 나간다고."
"나는 리쿠가 하고 싶으면 해. 근데 리쿠가 하기 싫으면..."
"그 쫑알대는 입 좀 막아버릴까보다."
"뽀뽀하기? 뽀뽀는 싫어. 리쿠 키스 못 한다며. 최악의 키스."
"누가, 하... 오시온."
키스도 싫다. 안는 것도 안 된다. 제발 손이라도 잡게 해 달라 애원해도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 이지랄... 실랑이 끝에 나는 지쳐버렸다. 그래 유우시, 네 뜻대로 그냥 여기에서 살자. 일도 안 하고 좋네. 잔뜩 비꼬아대며 유우시를 등지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꿈쩍하지 않자 유우시가 뻔뻔하게 좁아터진 1인용 침대로 올라와 내 옆에 눕는다. 비좁게 시리.
"뭐야. 가이딩 받기 싫다며."
"......"
굳이 보지 않아도 입을 삐죽이고 있을 유우시가 그려졌다. 하여간에 고집불통에 자존심만 드럽게 세 가지고는. 떡국 한 그릇 더 먹은 엉아가 한번 봐준다. 화해의 손길을 내밀자 슬쩍 새끼손가락을 잡아 온다. 애기도 아니고. 가끔가다 이런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어이없어 웃음이 터졌다. 오늘도 예고치 않게 웃음이 샜다.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는지 유우시가 팔꿈치로 나를 툭 치더니 결국엔 나를 따라 웃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끼손가락 3시간 동안 잡고 있기라는 최저 효율의 가이딩을 하게 된다.
말없이 새끼손가락만 잡힌 채로 20분쯤 지났을까. 유우시의 땀 때문에 내 손까지 축축해지는 것 같다. 어깨 너머로 색색 내쉬는 숨이 느껴지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됐다. 이러고 1시간 40분을 더 있으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유우시, 손잡아도 돼? 내가 잡고 싶어서 묻는 거야."
"웅... 근데 뽀뽀는 하면 안 돼."
"뽀뽀 안 한다고."
下
나는 붙잡힌 손가락을 빼내고 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가이딩을 흘려 넣는다. 유우시는 잠시 몸을 흠칫하더니 별 반응이 없어 나도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축축한 손바닥을 마주 잡고 있으니 가이딩 수치가 안정됐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우시가 손을 빼내고는 바지춤에 땀을 닦아낸다.
"왜 뽀뽀 안 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하기 싫다며."
"...문이 열렸네."
"뭐야. 유우시, 너 나랑 뽀뽀하고 싶었던 거지?"
"이제 문이 열렸어."
"나가 그럼."
나는 유우시가 먼저 나가길 기다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부러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문이 열려도 나갈 생각이 없는 유우시의 발이 문가에서 알짱거리는 게 자꾸 시선에 걸린다. 다리를 배배 꼰 유우시와 눈이 마주쳤다. 목덜미가 훤하네. 별것도 아닌 걸로 소문이 퍼지는 좁디좁은 센터에서 유우시와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유우시의 셔츠깃을 정리해 주려고 손을 뻗었을 뿐인데 유우시가 눈을 감고는 속눈썹을 파르르 떤다. 긴장했는지 손을 옷 속으로 숨기면서. 소매를 자꾸 잡아당기는 탓에 기껏 여며준 셔츠깃이 다시 벌어지며 목덜미가 드러난다. 어깨는 태평양처럼 넓어가지고는.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손바닥으로 등짝을 세게 스매싱하자 유우시가 눈을 번쩍 뜨며 비명을 지른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초리는 가볍게 무시하고 가못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유우시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치이. 시온이 형하고는 했으면서."
내가 너랑 키스를 왜 해. 꿈 깨라.
***
호출이 울렸다. 보나 마나 또 인력 부족하니까 가이딩 품앗이 좀 해달라는 호출이겠지. 애초에 같이 출동 나가서 방사 가이딩만 했어도 가이드도 센티넬도 이렇게 무리할 일 없었을 텐데. 이게 뭔 헛짓거리인가. 비척비척 일어나 알람을 확인했더니, 현장 출동이었다. 바로 화색이 돌았다. 현장 2팀 복귀인가 싶어서 빠르게 환복하고 나갔더니만 촬영 스태프들이 가득하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내 허리춤엔 마이크가 채워진다. 먼저 마이크를 채운 시온 선배는 어설프게 출동복을 입고 있는 유우시를 돕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팀장님, 마이크는 뭐예요? 현장 출동 아니었어요?"
"아... 현장팀 다큐 3일 찍기로 했는데, 국장님이 갑자기 홍보팀도 껴서 같이 찍으라고 하네. 일단 셋만 현장 따라가."
"사전에 말씀은 해주셔야죠. 저희 다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촬영하는 게 어디 있어요."
"야이씨, 나도 10분 전에 들었는데 어떻게 미리 말하냐. 나한테 따지지 마. 나도 힘없다?"
"이 팀으로 현장에서 합을 맞춰본 적이 없는데 출동이 말이 돼요? 유우시 같은 경우엔 현장 나갈 급도 아니고요."
"유우시가 홍보팀 얼굴인데 빠지면 쓰냐. 그냥 가서 현장 잡일이라도 시켜."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래요! 사고라도 나면요!"
"야 인마! 그러니까!!!"
큰 소리에 주변의 모두가 우리를 쳐다본다. 시선을 느낀 팀장님이 주변을 살피더니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너네는 그냥 촬영만 하면 돼. 어차피 지금 가면 현장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니까 가서 홍보팀이 마무리만 하면서 우리 방재청에선 이런 일을 합니다~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너는 리더까지 달아놓고 말귀를 왜 이리 못 알아 듣냐."
"......"
개노답이군. 이러니 윗대가리도 현장을 뛰어본 사람이 해야 되는데. 유우시의 가슴팍에 붙은 등급을 보라. C등급 센티넬. 하늘에 맹세하건대 난 결단코 나보다 등급이 낮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얕보고 무시하는 그런 차별적이고 시대역행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S등급과 C등급은 간격의 차이가 크다.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C등급에게 S등급과 일하라는 건 이제 막 걸음마 뗀 아기를 화재 현장에 던져두고 다른 소방대원들처럼 냅다 불을 끄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나머지가 땀 뻘뻘 흘려가며 사람들 구하는 동안 유우시 혼자 카메라 앞에서 키자니아 체험이나 하겠지. 못 미덥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한다. 상명하복. 그게 이곳의 법이니까.
재개발 현장에서 건물 철거 중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추정되는 부상자 15명과 실종자 2명. 대충 들었던 것보다 피해 규모가 더 컸다. 전달받은 것보다 꽤 심각한 상황에 촬영팀도 철수하자며 고민하는데 드론으로라도 찍으라는 국장 지시에 결국 현장까지 동행했다. 상황 보고를 들으며 메이크업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차에서 내리자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뒤를 돌아 유우시를 확인했다. 처음 와보는 현장에 놀란 눈치다. 쿨럭대며 손으로 코를 막고는 주변을 살펴본다. 저걸 데리고 대체 뭘 해야 해. 착잡한 표정으로 유우시를 부르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쳐온다. 같이 현장 2팀에서 일했던 선배다. 반가움에 목소리가 커졌다.
"선배!!"
"야, 꿀 빠는 홍보팀 가니까 좋냐? 왜 얼굴도 더 핀 것 같냐. 너 없으니까 현장이 더 빡세. 들어보니까 뭐 촬영한다던데 완전 연예인 다 됐네."
은근슬쩍 긁는다. 웃는 낯으로 대충 대꾸하며 보냈지만 이미 자존심엔 잔뜩 스크래치가 났다. 모양은 빠져도 홍보팀에서 춤추고 웃어주는 게 재난 현장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꿀 빠는게 맞으니까. 그럼에도 아직 나는 여전히 현장이 좋아서. 카메라 앞에 서서 웃고 떠드는 것보단 위험천만한 재난 현장에서 사람들 구하는 일이 더 심장 뛰어서.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힌다. 붕괴 사고 발생지 진입을 위해 방호 장비들을 챙기는데, 땀에 쩔은 사람들 사이로 뽀송하게 분칠한 유우시가 나만 졸졸 따라다닌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자꾸 거슬리게.
"넌 안 들어갈 거야. 방해되니까 저리 가 있어."
"나도 도울 수 있어."
"넌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정 돕고 싶으면 저기 가이딩 부스 가서 물이나 돌리든가."
고집스럽게 내 앞에서 버티며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가뜩이나 예민해지는 현장인데, 유우시랑 부딪히기 싫었다. 자리를 피하려는데 유우시가 나를 붙잡고는 서운하다는 듯 따지기 시작한다.
"자꾸 무시하지 마... 팀장님도 같이 들어가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너만 유난 떨잖아."
"너? 야, 엄연히 따지면 내가 너랑 기수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이게 진짜 봐줬더니. 동기들 다 집합시켜서 기합받아야 정신 차리냐? 봐... 넌 기본적으로 센터 규율 같은 건 다 무시하고 너 편한 대로만 살잖아. 맨날 사람들이 네 편의 봐주니까 모르겠지. 하긴, 너 전에 회사에서도 데뷔조라고 엄청 아꼈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랑 일하기 싫어하는 거야. 넌 촬영하러 온 거겠지만, 나한테는 현장이 우선이야."
분위기가 험해지자 주변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시온 선배의 인터뷰를 촬영하던 카메라 감독도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는 우리 눈치를 살폈다. 결국 하다 못한 시온 선배가 우리를 중재하러 왔다.
"리쿠, 리쿠. 얘기 끝났잖아. 국장님 지시인데 그냥 유우시는 촬영만 빠르게 하고 먼저 나가는 거로 하자. 어?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서 이러면 뭐가 되냐. 벌써 라방 사고는 다 잊었어?"
"아~ 그러네요. 유우시 목적은 그게 아니지. 현장 들어가는 모습만 보여주면 되는 거지? 내가 몰랐네. 들어가는 것만 찍으면 돼? 아니면 뭐, 어디까지 맞춰줘?"
"야 리쿠. 넌 말을 왜 그렇게 해. 현장에서 일해야만 센티넬이야? 다 각자의 위치가 있는 거고 거기서 본인 능력 열심히 펼치는 건데. 홍보팀 없었을 땐 현장팀도 욕 엄청 먹었던 건 다 잊었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센터에서 일하는 다른 직종은 뭐가 되냐. 그리고 유우시 능력이 디펜스인데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고는 없겠지. 좀 믿어줘. 같은 팀이잖아."
웅... 웅... 맞지. 시온 선배 옆에서 고개를 유우시가 작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참나. 지 편 생겼다고 홀라당 뒤에 숨어버리는 유우시의 태도에 열이 받는다. 고분고분해진 모습에 시온 선배가 세팅된 유우시의 머리를 헤집으며 묻는다. 누가 머리 만지려고만 하면 피하면서 오시온 앞에서만 손 타는 강아지가 된다.
"우시 할 수 있지? 형은 우시 믿는다?"
***
건물 진입부터 수월하지 않았다. 방진 마스크를 써서 호흡도 힘든데 콘크리트 분진들이 날리며 시야까지 흐릿했다. 발밑 잘 살펴, 넘어지지 말고. 익숙하게 앞장서는 시온 선배와 다르게 유우시는 내딛는 걸음 걸음이 불안하다. 휘어진 철근에 걸려 넘어질 뻔한 유우시를 잡아채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잔뜩 긴장한 유우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에 달린 카메라를 매만진다. 생체 신호를 따라 성큼성큼 내부로 들어가던 시온 선배가 천장이 무너져 막혀버린 입구 앞에서 멈추어 선다.
"하... 불안하게 왜 여기서 느껴지냐..."
큰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벽 너머를 투시하더니 나에게 손짓한다. 요즘 여기저기 다니며 무리를 했는지 능력을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마스크 안으로 코피를 쏟는다. 시온 선배의 손을 잡자마자 가이딩이 쑥 빠져나간다. 동시에 콘크리트 잔해들이 중력을 잃은 것처럼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입구를 대충 치운 후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무게를 지지하던 기둥이 쓰러지며 천장이 무너졌는지 폐건축 자재 더미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 더미 사이로 손이 보였다. 자재 더미들을 쓸어버리듯 치워버리자 회색 분진으로 뒤덮인 실종자가 나타났다. 서둘러 다가가 손목을 짚었지만 축 늘어진 손목에선 어떤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낯선 유우시가 벙찐 채로 얼어있었다. 내가 다그치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생존자를 찾았다고 무전을 한다. 구조대가 들어올 수 없을 만큼 협소한 공간에 실종자를 업고 나가기로 했다.
"잠깐만. 선배 말고, 유우시가 업고 먼저 나가자."
사망자를 수습하던 시온 선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현장을 오래 뛴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감. 심상치가 않다. 곧 2차 붕괴가 일어날 것 같다.
"그럼 시온이 형이랑 리쿠는?"
"나는 선배랑 나머지 실종자마저 찾아야지."
"같이 찾아서 나가면 되잖아..."
초조한 표정으로 천장 쪽을 투시하던 시온 선배가 차분하게 말했다.
"시간 없어. 우시야, 일단 실종자부터 내보내자. 리쿠랑 나만 남은 구역 수색하는 게 효율적이야."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나도 할 수 있어."
"유우시, 말 좀 들어. 평소에도 안 듣더니, 너 지금 능력 제어도 안 되잖아! 여기서 사고라도 터지면 그땐 정말 끝이야!"
답답한 마음에 자꾸 화를 내게 된다. 유우시는 제자리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순간 주변 공기가 기이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별안간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천장의 거대한 콘크리트 상판이 무너지며 나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그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진다. 피해야 하는데...
"리쿠!!!"
시온 선배가 손을 뻗었지만, 나를 끌어안는 유우시가 더 빨랐다. 순간적으로 유우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하늘빛 보호막이 파동으로 변하며 나의 몸을 감쌌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태 파악이 되지 않지만, 나를 끌어안은 유우시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
아무리 가이딩해도 받아들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바닷물을 가느다란 요구르트 빨대로 빨아들이는 듯한 답답함. 시온 선배를 가이딩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대로면 가이딩 수치가 내려가는 게 더 빠르겠다. 애가 탄다. 손잡는 걸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센터 도착 전까지는 그 이상의 접촉 가이딩은 하지 말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지금 정신 잃으면 위험하니까, 계속 말 좀 시켜주세요."
"우시야, 우시야. 정신 좀 차려봐. 형 목소리 들려? 응? 말 좀 해봐."
"으응..."
"유우시! 자꾸 눈 감지 말고. 그거 얘기해 줘. 우리 데뷔하는 얘기. 응? 형 그거 지금 듣고 싶어."
시온 선배가 유우시의 반대편 손을 계속 주물러댄다. 가이딩도 못 하는 주제에.
"...오늘 콘서트... 콘서트 하는 날이야. 콘서트장 밖에 우리 팬들로 빼곡해요. 다 우리 응원하러 온 사람들."
"응... 그리고?"
"나느은... 실감이 안 나. 빈 무대 위에서 사운드 체크를 하는데, 저 좌석들에서 누군가 볼 거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가만히 서 있어요."
"형은? 우시야, 그럼 형은 뭐 하고 있어?"
"형은 메이크업을 받고 있지요... 키라키라. 완전 아이돌."
"응. 우시랑 같은 무대 의상 맞춰 입고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무를 맞춰보다가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래서?"
"......"
"...우시야, 유우시! 정신 차려야지."
"...밖에 막 함성이 들리는데... 조명이 너무 눈부셔서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무서워... 형 나 너무 무서워요. 나 앞이 안 보여요."
"괜찮아. 형이 손잡고 있잖아."
"...안 괜찮아요. 다 꿈이잖아... 진짜가 아니잖아."
비참했다. 그렇게 무시하던 유우시를 지키지도 못하고 되레 내가 구해졌다는 사실이. 이 상황도, 이 대화에도 낄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유우시의 남은 손을 잡고 최대한 가이딩을 밀어 넣는다. 센터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간헐적으로 유우시가 몸을 떨며 발작을 일으킨다. 리쿠, 리쿠 잘되고 있는 거 맞아? 우시 좀 제발 살려줘... 시온 선배가 울면서 묻는데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가이딩 팀이 유우시의 베드를 옮긴다. 나도 따라서 가이딩 룸으로 들어가려는데 센터 연구원이 내 앞을 막아선다.
"뭐야, 비켜. 내가 가이딩 할 거야."
"2차 폭주 위험 있어서 약물 가이딩 들어갑니다. 국장님 지시예요."
"지금 상황에선 약물 주입하는 게 더 위험하잖아."
"그래도 리쿠 님은 안 된다고 합니다. 진정되면 다른 A급이나 B급 가이드 부르라고 하시겠죠."
"왜, 난 운 나쁘게 폭주 휘말려서 죽으면 안 되니까?"
"......"
"유우시는 죽어도 되고."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초조한 적이 있었을까. 가이딩 룸 앞에서 서성거릴 새도 없이 팀장 호출로 센터 입구에 불려 갔다. 언제 모여들었는지 기자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쏟아낸다. 꼭 책임질 때만 꼬리 자르는 건 어느 나라나 다 그런가. 센티넬의 폭주는 흔한 일이며, 유우시 대원은 무사할 것이라는 말을 내 입으로 하란다. 화가 나지만 꾹 참았다. 지금 화를 내봤자 유우시가 멀쩡하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은 곧바로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유우시의 폭주로 건물이 무너지는 영상들은 AI를 거쳐 더 잔인하게 변질 되어 온라인을 떠돌았다. 방재청을 만든 전 대통령의 업적을 까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는지 신문에선 각종 논평이 나왔다. '센티넬은 생체 무기 아니냐. 군대에 격리하지 않아도 되는가' 다시 한번 센티넬군본부를 주장하는 여론을 형성해 댔다. 그런가 하면 전국센티넬가이드인권단체는 '센티넬도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강제적으로 위험한 현장에 몰아넣는 것은 국가가 할 짓이 아니다' 외치며 방재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방재청 앞이 두 진영의 시위대로 붐볐다. 방재청은 당분간 NCT WISH의 활동을 멈추고,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안전을 더 강조하겠다는 사과문을 올렸다. 소속 센티넬이 다친 것에는 그 어떤 언급도 없이. 유우시의 폭주가 정치싸움으로 변질되며 정작 중요한 유우시는 지워진다.
아니,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 누구보다 유우시를 걱정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유우시가 그렇게 원했던 자신을 응원하고 사랑해 주는 팬. 그 이름하야 유즈니... 방재청 앞에 며칠째 'NCT WISH is 6', '6-1=0' 써 붙인 트럭이 서 있었다. '방재청은 당장 아티스트를 보호하라' 나는 그 문구를 보며 유우시를 아티스트라 여겨주는 팬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팬들이 보낸 시위 트럭은 언제까지 있을까요? 저거 유우시 형이 빨리 깨어나서 꼭 봐야 하는데. 유우시 형 완전 감동 먹을 텐데."
창 밖으로 트럭을 내려다보며 대영이 농담을 친다.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라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한번 폭주를 경험한 센티넬의 몸은 이미 망가져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다행히 2차 폭주는 없었지만 몇 주째 가이딩 수치가 안정되지 않는다. 링거를 꽂은 채로 죽은 듯이 누워있는 유우시를 보다 보면 너무나 불안해진다. 이러다 정말 영영 못 깨어날까 봐. 손을 꾹 잡아보지만 가이딩이 흘러 들어가지 않고 공중으로 새어 나간다. 대영이 그런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위로를 건넨다. 리쿠 선배, 형은 리더로서 최선을 다했잖아요. 너무 죄책감 느끼지마요. 시온 선배는 유우시가 다친 이후로 괴로워하며 현장에서 몸을 굴리며 스스로를 혹사하는 중이다.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유우시가 언제 깨어날지 곁을 지켰다. 대영이의 마음은 알지만 듣고 싶지가 않다. 내 반응을 살피더니 어깨를 토닥이며 먼저 가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문을 닫는다.
유우시는 가만히 누워 아무 반응도 없다. 찌푸려진 미간, 가지런한 속눈썹. 가끔가다 우물거리는 입술. 내 앞에서 눈을 질끈 감은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유우시가 그리워질 지경이다. 가이드로서 일할 때 한번도 사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사심이 생겼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문란하고 더러운 육체적인 가이딩 말고. 빨대 굵기의 주삿바늘로 쑤셔서 팔에 멍 자국만 남기는 약물 가이딩도 말고. 땀이 축축하게 밴 손바닥을 맞잡고 조심스럽게 흘려 넣는 그런 가이딩을 하고 싶다는. 찌푸려진 미간을 편하게 펴주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 대신 골골골 코 고는 소리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자장가 같은 가이딩. 고개를 숙이고 버석 마른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춰본다. 역시나 아무 느낌이 없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맞잡은 손 위로 얼굴을 묻었다. 내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
또다시 건물이 무너집니다. 저는 급하게 주위를 살피며 유우시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유우시의 폭주를 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유우시는 보이지 않고 굉음과 함께 제 위로 자재들이 떨어지네요. 저는 이렇게 죽는걸까요...
그때였습니다. 그 뿌연 분진 사이로 수염을 기르고 망토를 뒤집어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나타났어요. 허어억... 역시 이건 꿈이 맞겠죠? 뺨을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려는 사이 그는 내 앞에서 해리포터처럼 말했습니다.
"Konnichiwa, Are you maeda riku desuka?"
"어... 아무래도 여긴 제 꿈인 것 같은데, 자동번역 패치가 될 테니 끔찍한 영본어는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Oh, sorrymasen."
"......"
"Ah, ah, 아아. 큼. 이제 됐군. 마에다 군이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닥터 스트레인지. 어벤져스에서 나왔다네. 자네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보다 어벤져스에 영입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지."
"어벤져스요?! 그럼 저도 블랙팬서처럼 될 수 있는 건가요?"
"일단은 앤트맨 옆 특수요원으로 15초 정도 출연은 하겠지만. 뭐, 어때. 우리와 함께 어벤져스가 되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힘쓰지 않겠는가?"
순간 제 머릿속에선 어벤져스 멤버들과 우주로 떠나 외계인과 싸우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앞니 빠진 채로 골목에서 히어로 놀이를 하던 때부터 꿈꿔왔던 모습이었죠. 정말이지 바라고 바라던 꿈 말이에요. 그러니 바로 저요 저요 제발 저요 제가 아니면 안돼요 제발 저요 오직 이날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제발 제가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제발 저요라고 대답을 하면 되는데... 그런데... 맘에도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뭐죠?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에게도 어벤져스 같은 NCT WISH라는 팀이 있고 저를 믿고 따라주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말게나. 동료들에게서 너라는 존재를 다 지워주면 그만이니."
"그게 가능한가요? 역시 못 하는 게 없는 닥터 스트레인지...!"
"칭찬은 거기까지만 하고. 다시 한번 묻지. 마에다군, 어벤져스에..."
세상에 먹기 좋게 굴러온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는 바보가 있을까요? 근데 자꾸 마음 한구석이 찜찜합니다. 기다렸던 호그와트행 열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데 문득 내가 집에 가스불을 끄고 나왔나? 헷갈리는 그런 찜찜함 말입니다.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내내 불안할 것 같은 그런 기분.
"잠깐만요! 저 말고도 다른 사람도 같이 지워줄 수 있어요? 저랑 같은 팀에 토쿠노 유우시라고 있거든요. 만약 걔에 대한 기억도 지운다면 걔도 평범하게 아이돌 할 수... 아니. 그냥 걔의 능력을 없애버릴 수도 있나요? 아, 근데 유우시가 지금 병원에 있어요. 능력을 없애면 깨어날..."
"말이 길군."
저는 기어코 집으로 가서 확인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화재 안전은 중요하니까요. 갑자기 가스 안전 예방 3분까진 필요 없어 멜로디가 울려 퍼집니다. 그래서 가스불은 꺼져있었냐고요? 문을 여니 강아지똥처럼 애처로운 얼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유우시 말이에요. 이 녀석은 대체 어쩌자고 제 꿈속에서까지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걸까요. 저는 이제 정말로 닥터 스트레인지와 함께 호그와트로 떠나야 하는데... 어깨 위의 해드위그가 쿠우쿠우- 울며 대답을 재촉합니다. 저도 모르게 자꾸 맘이 급해지네요.
"주문은 아주 간단해야 해. 참고로 어떤 멀티 버스에선 너처럼 조건을 계속 덧붙이고 덧붙이다 애인도, 친구도, 가족도 그리고 마침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잊힌 비운의 히어로가 있지."
전 정말 어벤져스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명색이 리더인데 팀원들 다 버리고 저 혼자만 마법사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상 능력이 사라지게 해주세요."
"네가 가진 능력도 사라질 텐데?"
"알아요."
"자네가 여태까지 이뤄온 꿈, 명예. 모든 것들을 버리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건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니까요."
"더 고민해 보지 않겠나. 이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라네. 고작 그 technoyoushit 때문에 날리기엔 안타까워서 그러니."
"저는... 그 애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토쿠노 유우시예요."
"참으로 착한 아이로군, 너에게 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주겠노라. 정답이 필요할 땐 언제나 기억하렴. 역경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언제나 네 안에 있단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가슴을 쿡 찌르며 저를 연못 속으로 빠뜨립니다. 이 미친 산신령이! 저는 우주를 가르고 저 멀리멀리 멀티버스로 뚝 떨어지네요. 으아아아아아ㅅㅂ꿈...
침을 닦아내며 주위를 살피니 유우시의 병실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새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유우시의 가이딩 수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죠. 그러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가르침대로 이 난관을 헤쳐나갈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어떻게 S급이 되었는지 설명했었나요? 그건 말이죠, 전 가이딩 능력도 뛰어나지만 처음엔 센티넬로 발현했습니다. 정부에선 그 능력이 너무나 강력하기에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되는 기밀이라고 하셨기에 일본 센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죠. 능력 제어 칩을 이식하고나선 저 역시도 까먹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의료용 메스를 슬쩍해 망설임 없이 팔뚝을 그어 능력 제어 칩을 꺼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능력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
만약 나에게 이상 능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난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수퍼 히어로가 되고 싶었으니까 능력이 없어도 지금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현실은 달랐다. 능력이 있다 없으니까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난 이제 겁 없이 위험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먼저 나서지 않게 되었다. 나에겐 능력이 없으니까. 힘이 없으니 따를 책임도 없다는 핑계로 자꾸 몸을 사리게 되는 점점 비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 능력이 사라진 세계에서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일본의 한 가구 회사 영업팀에 취업했다. 지진에서도 안전하고 견고한 가구로 유명한 회사였다. 한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한국 출장은 전부 나에게 맡겨졌다. 청주 오스코에서 열리는 가구 박람회 준비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가끔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했던 선택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면세점 광고판에 크게 걸려있는 유우시의 얼굴과. 센티넬 제복을 입지도 않았고, 머리도 핑크색으로 염색했지만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유우시였다. 결국 원하던 꿈을 이뤘구나.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유우시는 원하던 삶을 찾았는데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갑자기 마주하게 된 유우시 때문에 순간 여러 감정이 몰아친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 나는 이제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애써 잡생각들을 떨쳐냈다. 이제 나에겐 이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 현실이다.
박람회 일정이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로 택시에 몸을 맡겼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단할까.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는 데 익숙한 거리가 보인다. 그제야 회사에서 예약한 호텔이 세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호텔에선 배려해서 공원 뷰의 방을 배정했겠지만, 아까 낮부터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수공원으로 나갔다. 비록 방재청과 센티넬가이드센터 자리엔 기재부가, 매일 훈련하던 체력단련장은 싹 밀리고 커다란 복합쇼핑몰이 들어섰지만 다시 찾은 세종은 나의 기억 속에나 존재하는 그때와 너무 똑같아서. 내가 꿈꾼 건 아니구나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을 깠다. 러닝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 정리를 하는데, 자꾸 한 사람이 같은 곳만 반복해서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기묘한 기시감에 취했나 싶어 자리를 치우는데 누군가가 대뜸 말을 걸어온다.
"나 몰라요? 나 세종시 홍보대사인데."
동의도 없이 옆자리에 앉더니 모자를 벗고 다 터져버린 반곱슬의 핑크색 머리를 꾹꾹 누르며 정리한다. 왜 모르겠어.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아 그 뻔뻔하게 친한 척을 하는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네가 정말 나를 기억하나? 어떻게? 반가움보다 설마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내가 왜 서울시 홍보대사 안 하고 여기까지 와서 홍보대사 하는지 알아요?"
뭔, 거창한 이유가 있을까. 서울시가 안 시켜줬나보지... 저 얼굴만 보면 괜히 딴지를 걸고 싶었으나 나는 아까부터 말문이 막힌 상태이므로 또 넋을 빼놓고 그 애의 구석구석을 살필 뿐이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는지.
"나 계속 계속 기다렸는데.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범인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 억울하기도 한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범인으로 몰려서 그런가 괜스레 코끝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왜 대답이 없어."
"......"
"왜 그런 선택을 했어? 나를 위해서?"
"......"
"나를 좋아해서?"
"......”
대답이 없자 답답한지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 굴리는 게 다 보인다.
"리쿠, 아직도 키스를 못 해?"
말주변 없는 건 여전하구나. 눈치도 없고. 엉뚱하고. 사랑스럽고.
"...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
"아니. 리쿠 마음. 리쿠 마음이 궁금해.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
굳이 대답이 필요할까. 바로 입술부터 붙였다. 깜짝 놀라 눈만 깜빡깜빡. 키스할 때 눈 감는 건 누가 안 가르쳐줬나 보지. 맞붙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샌다. 실은 나도 진작부터 이러고 싶었나봐, 유우시.
땡큐, 스트레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