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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타이 : 마이너스너는영영

​승

 

"이게 정말 토 대리의 최선은 아닐 거 아니야?"

팀장의 단내 나는 입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유우시는 그 냄새가 마치 자신의 일상을 썩게 만드는 악취처럼 느껴졌다. 숨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해 오겠습니다 같은 말은 이미 지난주에 그만두었다. 스물여섯의 유우시는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겨우 여섯 살짜리 아이만큼의 권리도 갖지 못한 채 마모되어 갔다. 딱히 상처받는 타입은 아니라고 자부해 왔지만, 마음의 두께가 얇아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안구 뒷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른이 되면 눈물 정도는 머금고 사는 거라고들 했다. 유우시에게 그 머금음은 서서히 차오르는 수렁 같았다.

옥상에서 마주친 마사토는 여전히 비겁하고 능청스러웠다. 아내의 임신을 핑계로 담배를 끊겠다던 그는 유우시의 손에 든 마지막 돗대를 당연하다는 듯 가져갔다.

"토쿠노 상은 보라카이 가 봤어? 거기 바다가 엄청 예쁘거든."

유우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사토의 입에서 리사이클되는 정보들은 팀장의 잔소리만큼이나 무가치했다. 업무가 밀렸다며 자리를 피했지만,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마주한 제 얼굴은 이미 한계였다. 미식거리는 속을 달래려 가슴을 퍽퍽 두드리자,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다 몸 안의 오물이 넘쳐 흐르는 것에 가까웠다.

 

사쿠야가 질긴 야키니쿠를 질겅질겅 씹어 뜯는 소리가 텅 빈 대화 사이를 메웠다. 유우시는 초점을 잃은 채 가게 구석에 걸린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화면 속 파란 바다가 일렁였다.

"보라카이 단돈 칠만이천 엔…."

"보라카이?"

사쿠야가 유우시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어이. 토쿠노 유우시. 그제야 고개를 돌린 유우시는 집게로 잘 익은 고기를 집어 들었다. 사쿠야는 유우시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다 입을 다물었다.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은 얼굴. 그 위로 드리워진 피로의 그림자가 너무 깊어, 사쿠야는 차마 더 캐묻지 못하고 제 몫의 고기를 유우시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유우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얼굴에 大자로 써져 있거든. 사쿠야의 호통 같은 말에 유우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유우시의 웃음은 한 번 시작되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 편이었다. 결국 옆에 따라 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하마터면 고깃집 바닥에서 구를 뻔. 그런 꼴은 정말 사양인데.

"사쿠야는 과제 안 해?"

"포트폴리오면 이미 제출했지."

"무슨 포트폴리오?"

사쿠야는 젓가락을 멈추고 유우시를 빤히 바라봤다. 섭섭함보다는 당혹감이 서린 눈이었다.

"나 취직 준비 하잖아."

유우시는 그 말을 듣고도 멍한 표정이었다. 고기를 씹어 삼키며, 방금 들은 정보가 뇌에 닿기도 전에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전에 말했는데."

사쿠야의 낮은 목소리에 유우시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요즘 바빠서 그런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유우시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사쿠야는 더는 묻지 않고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었다. 다 익은 고기였지만, 유우시가 좋아하는 바싹 익은 식감을 위해 괜한 손길을 더했다.

 

"오늘 보면 또 언제 봐?"

사쿠야의 물음에 유우시는 갸웃거리며 웃어 넘겼다. 지하철 역 앞에 다다르자 유우시가 먼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유우시."

"응?"

"담배 많이 피지 말고!"

흐릿하게 들려오는 열차 도착 안내 방송에 사쿠야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유우시도 곧장 몸을 돌려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담배나 몇 대 피울까 잠깐 고민하다 결국은 가방 안에 그대로 처박아 두었다.

사쿠야의 배웅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던 유우시의 눈에 낡은 관광사 하나가 들어왔다.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늘 문 앞에 작은 트리를 내놓는 곳이라 몇 번쯤 눈에 익은 적이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곧장 집으로 향했을 텐데, 괜히 흥미가 돋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실수한 것 같기도. 유우시는 본능적으로 다시 문 쪽을 돌아봤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인사 대신 크게 벌어진 하품을 내보였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프린터기와 묘하게 싸구려 같은 인센트 향까지. 사무실 안에는 오래 환기하지 않은 공기가 눌어붙어 있었다. 유우시는 자칫하면 여행이 아니라 골로 가는 것 아닐까 하는 직감까지 들었다. 입구에 놓인 팜플렛을 하나 집어 들자 그제야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가시게?"

"보라카이 쪽이요."

"보라카이 쪽은 없고, 보라카이는 있지."

아저씨는 혼자 개그를 친 뒤 피식피식 웃었다. 유우시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이런 유머에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상형 앞이 아닌 이상 억지웃음 따위 짓지 않는 편이었다면, 언제부터인가 바보처럼 남의 말에 쉽게 동요해 웃는 일이 잦아졌다.

"날짜는?"

"언제가 제일 예뻐요?"

"다음 달이 와따지."

아저씨는 키보드를 두들기더니 견적을 뽑았다며 사무실 안쪽으로 유우시를 불러들였다. 안쪽은 바깥보다 더 지저분했다. 유우시는 소매로 입가를 살짝 가린 채 아저씨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가이드가 정말 인기 만점이야. 여기 후기만 봐도."

아저씨가 마우스를 굴리며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스크롤이 내려갈수록 댓글 숫자가 끝없이 늘어났고, 어느새 화면 가장자리에는 999+ 표시가 떠 있었다. 말 그대로 진짜 인기 만점이네. 아저씨는 곁눈질로 유우시의 반응을 살피며, 인기글 몇 개를 골라 소리 내 읽어 주기 시작했다.

"봐. 친절한 가이딩에 센스 있는 입담까지 있고."

"이 사람으로 할게요."

"잘 생각했어."

내일 여권을 들고 다시 오라는 말을 끝으로 관광사를 나온 유우시는 집까지 냅다 뛰어갔다. 방금 저지른 일은 유우시에게 꽤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혼자 해외여행이라니. 밀린 연차를 탕진할 생각에 벌써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안전을 위해 좌석벨트를 매주시고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은 제자리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우시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비행기 모드를 해제했다. 액정 위로 날짜와 시간이 보라카이 현지 시각으로 바뀌어 떠올랐다. 이래서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았던 걸까. 입국장을 나서자마자 쏟아지는 정신없는 공항의 풍경 속에서 유우시는 눈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국적 모를 방송 소리, 매끄러운 바닥을 거칠게 긁고 지나가는 수만 개의 캐리어 바퀴 소리, 그리고 고온다습한 공기에 섞여 드는 낯선 언어들이 유우시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섞어 놓았다. 도쿄의 소음이 질서 정연한 압박이었다면, 이곳의 소음은 날 것 그대로의 혼돈이었다.

겨우 트렁크를 찾아 들고 공항 와이파이에 연결하자마자, 라인 알림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낡은 배낭에 작은 종이 깃발 하나가 꽂혀 있는 사진. 그 아래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이모티콘 하나가 달랑 달려 있었다. 사진 속 깃발에는 마치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S2 Tour'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유우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 사이를 훑던 유우시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수많은 관광객과 피켓들 틈에서, 다 찢어져 가는 상자 조각을 부채처럼 펄럭이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고르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넘겨버린 머리칼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 남자가 뿜어내는 기이할 정도의 활기 때문이었을까. 유우시는 휴대전화 화면 속 깃발 사진과 눈앞의 남자를 번갈아 보며 제 발로 찾아온 투어리스트의 존재를 확인했다.

"혹시 토쿠노 유우시 상 맞으신가요?"

번잡한 소음을 뚫고 시원한 시트러스 향과 함께 익숙한 모국어가 귓가에 꽂혔다. 유우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유우시의 확인에 안도한 듯 활짝 웃더니, 뒤로 돌아 제 배낭에 꽂힌 사진 속 그 깃발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고는 깃발 하나를 더 꺼내 유우시의 백팩에 툭, 꽂아주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린 듯, 발치에 떨어져 있던 상자 조각을 다시 집어 들고 유우시에게 내밀었다.

"웰컴 투 보라카이!"

발음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주변의 어떤 전문 가이드들보다도 진한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남자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입꼬리와 함께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매가 유난히 유우시의 시선을 붙들었다. 잘생겼어…. 유우시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읊조렸다. 도쿄의 빌딩 숲에서는 결코 마주칠 수 없을 것 같은 종류의 생명력이었다. 유우시의 시선을 느낀 건지, 남자는 잠깐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투어 가이드를 시작했다.

 

그의 걸음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유우시는 제 백팩에서 달랑거리는 종이 깃발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낡은 관광사의 지저분한 안쪽 사무실에서 아저씨가 소리 내 읽어주던 후기들이 문득 떠올랐다. 센스 있는 입담과 친절한 가이딩. 왜 얼굴 얘기는 없었지? 엄청난 미인인데….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 위로 바이크 몇 대가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의 단체 관광객은 대기 중인 대형 버스로 몸을 실었지만, 리쿠는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유우시는 영문도 모른 채 묵직한 트렁크를 질질 끌며 그의 뒤를 따랐다. 캐리어 바퀴가 거친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투어리스트 마에다 리쿠입니다."

리쿠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돌려 말했다. 유우시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 이름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마에다 리쿠.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얻은 타인의 고유명사였다. 어딘가 익숙한 울림이라고 느낄 즈음, 리쿠가 먼저 가벼운 질문을 던져왔다.

"몇 살이에요?"

"스물여섯이요."

"뭔가 친구 같다고 느꼈는데 역시."

아 그렇군요. 리쿠의 친근한 말투에 유우시는 짧게 대꾸하며 시선을 피했다. 낯선 이와의 갑작스러운 거리감 때문일까, 뒤통수에서부터 시작된 기분 나쁜 열기가 눈과 코를 지나 입가까지 감싸듯 번져나갔다. 불쾌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열기였다.

삐빅, 소리와 함께 리쿠가 빨간 바이크에 올라탔다. 유우시가 멀뚱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만 보자, 리쿠는 능숙하게 시동을 걸고는 굵은 밧줄을 꺼내 유우시의 트렁크를 뒷좌석에 단단히 묶어 고정했다. 제 배낭은 앞으로 돌려 맨 리쿠가 여분의 헬멧 하나를 건네며 턱끝으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근데 왜 혼자 왔어요?"

"음…."

"안 물어볼게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유우시가 입을 다물자, 리쿠는 정말로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엔진의 진동이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유우시의 손을 끌어 제 허리에 감았다. 확인하듯 그 위를 한 번 꾹 눌러준 손길이 지나간 뒤, 바이크가 매끄럽게 출발했다.

바이크라니. 유우시는 한동안 자신이 이 불안정한 바퀴 위에 올라탔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속도가 붙자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익숙하지 않은 속도감에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찼다. 이대로 손을 놓으면 미끄러져 아스팔트 위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십 년 만이었다. 십 년 만에 다시 바이크 위에 올라탄 셈이었다. 유우시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중학생 때의 풍경을 떠올렸다. 두 살 많은 형과 어쩌다 교제하게 되면서, 몇 번인가 그의 등을 끌어안고 새벽 공기를 가른 적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막연한 해방감과 공포가 리쿠의 등 위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유우시는 절박하게 리쿠의 허리를 더 꽉 붙잡았다.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호텔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리쿠는 로비 입구에 유우시를 먼저 내려주고는 바이크를 돌려 주차장 쪽으로 금세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유우시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로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얼마 안 가, 리쿠가 유우시의 캐리어를 끌고 로비로 들어왔다. 그는 능숙하게 체크인을 마치고는 호텔 키 하나를 내밀었다.

"저는 304호, 토쿠노 상은 305호."

유우시는 차가운 카드 키를 건네받았다. 리쿠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다가 덧붙였다.

"저녁 혼자 먹기 싫으면 라인 주세요."

유우시는 그 말이 투어리스트의 비즈니스적 유머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호의인지 가늠해 보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유우시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쿠도 그제야 긴장을 푼 듯 따라 웃었다.

바람을 맞고 달린 탓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거울 속에 비친 우스꽝스러운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서야 동시에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말없이 삐죽 거리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괜히 몇 번 더 꾹꾹 눌러보던 손길은 더 손댈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서야 멈췄다.

3층 복도, 유우시의 방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리쿠의 발소리가 옆방으로 향했다.

호텔 침대의 낯선 바스락거림 속에 몸을 뉘자마자 묵직한 수마가 덮쳐왔다. 유우시는 미니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내 이마에 대충 올려둔 채 스마트폰을 켰다.

필리핀 음식. 베트남의 쌀국수나 태국의 똠양꿍처럼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메뉴가 없었다. 과일 몇 조각으로 때우기엔 하루 종일 굶주린 위장이 자극적인 것을 갈구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방금 샤워를 마친 듯 개운한 차림의 리쿠가 서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비누 향이 복도의 눅눅한 공기를 밀어냈다. 유우시는 잠결에 눌린 뒷머리를 황급히 매만지며 문틈 사이로 리쿠를 올려다봤다.

"저녁 먹었어요?"

"아니요."

식당을 좀 뒤져봤는데 허탕이었어요. 유우시는 머쓱한 듯 웃으며 방을 나섰다. 리쿠는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슬리퍼를 끌며 유우시를 밤의 거리로 이끌었다.

화려한 관광지였지만 밤이 깊어지자 인적은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낮 동안 딱딱한 컨버스를 신고 비행기와 바이크를 견딘 탓일까, 발바닥을 찌르는 통증에 유우시의 속도가 점차 처졌다. 리쿠는 말없이 유우시의 보폭을 살피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묻는 대신, 그는 유우시의 발치에 몸을 숙여 신발 끈을 헐렁하게 고쳐 묶어주었다. 유우시가 고맙다는 말을 내뱉기도 전, 리쿠는 근처 시장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싸구려 삼선 슬리퍼 한 켤레를 사 들고 돌아왔다.

"여행 다니는 동안 이거 신어요."

"감사해요…."

ありがとう…. 유우시가 무심결에 내뱉은 작은 목소리에 리쿠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유우시를 향해, 리쿠는 마치 방언이 터진 사람처럼 구수한 사투리를 쏟아냈다. 귀엽네요, 매력 보이스. 에…. 매력 보이스요? 좋은 의미예요. 엄청나게.

리쿠는 유우시가 벗어 놓은 흰 컨버스를 마치 제 물건인 양 손가락에 꿰어 달랑거리며 걸었다. 인터넷 후기에서 보았던 상냥한 가이드라는 수식어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유우시 역시 굳이 본인이 들겠다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낯선 이의 호의를 이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 얼마만이더라.

"피자 어때요?"

"좋아요."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아 적막한 거리에서 홀로 환하게 불을 밝힌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갓 구워낸 화덕피자 한 판을 주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망고 디저트까지 해치우기로 합의를 봤다. 매일 회사 상사들의 입맛과 눈치를 살피느라 피자 같은 음식은 구경한 지 오래였다. 억눌려 있던 식욕이 해방되자 묘한 흥분이 차올랐다.

가게 스피커에서 익숙한 케이팝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유우시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리듬을 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리쿠가 케이팝을 좋아하느냐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유우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망고 주스를 마시며 도착한 해변가에는 늦은 밤임에도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수록, 유우시의 마음속에는 묘한 공허함이 차올랐다. 말 한마디 없이 이 정적에 잠겨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유우시는 서둘러 침묵을 깨뜨렸다.

"가족분들도 필리핀에 있어요?"

"가족은 일본에 있어요."

혼자 떨어져 일한다는 점은 같았지만, 거리로 따지면 리쿠 쪽이 훨씬 더 외로운 처지였다. 어떤 위로를 건네도 섣부른 동정처럼 들릴까 봐, 유우시는 입을 다무는 대신 컵 바닥에 붙은 망고 과육을 숟가락으로 벅벅 긁어 먹었다.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후쿠이 가 봤어요?"

"한 번 가 봤어요. 출장 때문에."

"진짜요? 매번 물어봤거든요. 근데 가 본 사람은 처음이에요."

리쿠는 유우시가 자신의 고향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했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데도 이 먼 타국에 혼자 와 있다니. 그래서 다정하구나…. 유우시는 리쿠가 가진 그 따뜻한 배경이 부러웠다. 설령 도망쳐 온 곳이라 해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리쿠는 유우시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왜 혼자 왔는지 진짜 안 알려 줄 거예요?"

눈을 찡긋거리며 묻는 리쿠의 얼굴을 보자, 유우시는 저도 모르게 방어 기제를 내려놓고 답을 내뱉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왔어요."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지금까지 여기서 외로웠어요?"

"이런 얘기 하면 좀 뭐한데."

"응?"

"전 여기 유배 온 거예요."

유배? 예상치 못한 단어에 유우시가 눈을 크게 떴다. 리쿠는 쑥스러운 듯 헛웃음을 지으며,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유우시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담담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쿠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우시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리쿠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셔츠 자락을 끌어당겨 그를 다시 제 옆에 앉혔다.

"그 이야기는 내일 해 줄게요."

아아…. 유우시의 뜻밖의 앙탈에 리쿠의 웃음보가 한 번 더 터졌다. 식사 한 번에 경계를 풀고 다가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양이 같았다. 리쿠는 다정한 손길로 유우시의 옷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어준 뒤, 다 마신 컵과 숟가락을 대신 받아 쥐었다. 유우시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유배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밝게만 보이던 리쿠의 뒷모습이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아침잠 많은 편이면 모닝콜 해 줄게요."

"어…."

"잠 많아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일곱 시 반까지 안 나오면 제가 깨우러 가는 걸로. 문을 사이에 두고 헤어지는 순간, 유우시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 더 대화하고 싶다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보라카이에 온 원래 목적을 떠올리며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유우시는 서둘러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리쿠 역시 심장이 소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마터면 그 맑은 얼굴에 홀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뻔했다. 침대까지 가는 그 짧은 30초 동안, 리쿠는 이유 모를 들뜬 기분에 괜히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냉장고 속 생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애꿎은 찬 기운만 들이켰다. 어색해서 그런 걸까. 이상한 설렘이 가슴 한 켠을 가득 채웠다.

 

 

おはよ. 리쿠의 낮은 아침 인사가 문틈 사이로 흘러들었다. 유우시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었다. 밤새 가동되었던 에어컨의 서늘한 냉기가 복도로 쏟아져 나와 리쿠를 감쌌다. 리쿠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유우시의 옷차림을 훑었다. 추우면 에어컨을 끄지, 후드는 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리쿠는 자연스럽게 에어컨 전원을 끄고, 잠이 덜 깬 채 비틀거리는 유우시를 가만히 기다렸다. 연신 하품을 내뱉던 유우시는 리쿠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캐리어에서 캡 모자를 꺼내 머리에 푹 눌러썼다.

"잘 잤어요?"

"엄청 잘 잤어요."

"그래 보이네요."

"에에…."

유우시의 멍한 반응에 리쿠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에…. 리쿠는 유우시의 말투를 짓궂게 따라 하더니 혼자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유우시는 시원하게 올라가는 그의 입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대뜸 질문을 던졌다.

"여자친구 있어요?"

"어때 보여요?"

"있어 보여요."

"궁금하면 팁 주세요."

리쿠의 능청스러운 말장난에 이번에는 유우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도쿄의 사무실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가벼운 농담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호텔 뷔페 앞에 다다르자 리쿠는 직원에게 영어 몇 마디를 능숙하게 건네고, 유우시의 팔을 가볍게 끌어 안으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아 접시를 채워 온 두 사람의 메뉴는 극명하게 갈렸다. 리쿠의 접시 위에는 보라카이의 햇살을 머금은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유우시의 접시 위에는 아침부터 고기와 새우볶음밥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리쿠가 바나나와 망고를 여유롭게 베어 무는 동안, 유우시는 새우볶음밥을 무서운 속도로 비워냈다. 리쿠는 정말 잘 먹네요 같은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땡그래진 눈으로 유우시의 식사를 바라보며 제 나름의 감탄을 표할 뿐이었다. 유우시는 그런 시선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접시 바닥에 남은 밥알 한 톨까지 싹싹 긁어 해치웠다.

"맛있어요?"

"대박."

"어제 먹은 피자보다?"

"음… 피자가 조금 더."

 

이틀 차, 본격적인 여행의 막이 올랐다. 도쿄에서의 일상이 아득한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보라카이의 공기는 이질적이면서도 달콤했다. 리쿠는 유우시를 이끌고 어젯밤의 그 해변으로 향했다. 유우시는 이제 제법 능숙한 몸짓으로 바이크 뒷자리에 올라타 리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리쿠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모래 위에 넓게 깔았다. 유우시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팔짱을 낀 채 에메랄드빛 바다를 응시하다가, 옆에 앉으라는 리쿠의 고갯짓에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시 차림에 선글라스를 걸친 리쿠의 실루엣이 이국적인 배경과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괜찮아요?"

"뭐가?"

"셔츠에 모래 묻잖아요."

"몰라요, 그런 건."

"응?"

"나도 누군가한테 내 셔츠를 자청해서 내어준 건 처음이라서."

유우시는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그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끝내 그 호의의 무게를 계산해 내지 못했다. 사회에서 겪어온 거래처 사장에게 각티슈를 건네는 정도의 예의와는 애초에 결이 달랐다.

리쿠는 정작 셔츠 위에 앉지 않고 맨모래 위에 자리를 잡았다.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꽤 많은 사연이 응축된 숨결이었지만, 다행히 모래를 만지작거리는 유우시에게까지 닿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리쿠는 잠시 후 물티슈를 챙겨오겠다는 핑계를 대며 바이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유우시의 무구한 옆얼굴을 견디기 힘들어 잠시 자리를 피한 것에 가까웠다. 한 번 귀엽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마다 시선을 떼어버리기 일쑤였다. 게스트로 대해야 하는데 자꾸 뇌가 절여진 것마냥….

리쿠가 돌아왔을 때, 유우시는 이미 물가에서 이름 모를 아이와 무언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쿠가 다가가자 유우시는 자연스럽게 셔츠를 털어 내밀며 손을 닦아냈다.

"무슨 얘기 했어요?"

"그냥 바다 좋아하냐 같은 거."

"유우시 상은? 바다 좋아해요?"

대답을 고민하던 찰나, 예고 없이 파도가 발등 끝까지 밀려들었다. 지면을 보던 유우시는 중심을 잡으려 리쿠의 팔을 꽉 붙잡았고, 리쿠는 그 얼굴을 바라보느라 피할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그의 신발 속으로 바닷물이 울컥 밀려 들어갔다. 아아… 찝찝해. 오랜만에 멋을 부린답시고 신었던 운동화가 젖어 들자 리쿠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 옆에서 유우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그냥 웃겨서."

"뭐가 그렇게…."

유우시는 손가락으로 리쿠의 푹 젖은 신발을 가리켰다. 리쿠는 항복하듯 모래사장 한편으로 물러나 신발과 양말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유우시는 이미 젖은 양말을 벗고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한 쪽이라도 줄까?"

유우시는 신고 있던 제 삼선 슬리퍼 한 짝을 리쿠에게 쓱 내밀었다. 어이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상황이 우스워서일까. 리쿠의 얼굴을 짓누르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응?"

유우시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슬리퍼를 한 번 더 리쿠의 발치로 밀어 넣었다. 리쿠는 제 발보다 훨씬 작은 슬리퍼에 왼쪽 발을 우겨넣었다. 뒤꿈치에 모래가 잔뜩 묻어 서걱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유우시는 리쿠의 굵은 팔뚝을 붙잡고 다시 파도가 몰려오는 쪽으로 그를 끌고 뛰어갔다.

소리와 함께 종아리에 부딪힌 파도가 포말을 그리며 두 사람의 몸에 튀었다. 유우시의 반바지에도, 리쿠의 반바지에도 짙은 바닷물 무늬가 번졌다. 둘은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유우시는 거센 물살이 들어올 때마다 휘청이며 리쿠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고, 파도를 온몸으로 맞았다. 리쿠 역시 밀려나려는 유우시를 붙잡은 손에 더욱 단단하게 힘을 주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서로를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고작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이 뭐라고, 두 사람은 자석이라도 된 듯 밀착해 연거푸 밀려드는 파도를 맞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어느 커플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팝송이 파도 소리 사이로 기분 좋게 감겼다. Tom Misch의 Movie.

 

아까 유우시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던 여자아이가 다시 모래를 차며 둘 쪽으로 다가왔다. 유우시는 젖은 손을 반바지에 대충 슥슥 닦고는 반갑게 아이를 맞이했다.

"린나!"

"유우시 군! 친구가 있었네요?"

린나의 해맑은 물음에 유우시는 찰나의 망설임을 담아 옆에 선 리쿠를 슬쩍 쳐다보았다. 리쿠는 어느새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린 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유우시는 린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무척 외로워 보였는데, 다행이에요!"

"그랬구나. 린나 부모님은 어디 계셔?"

"저~기요."

린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해변 저 멀리를 가리켰다. 리쿠가 다정한 목소리로 얼굴에 붙은 린나의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며 타일렀다.

"이런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

린나는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펴서 조개껍데기 두 개를 유우시에게 건넸다. 헤~ 고마워. 유우시는 아이의 순수한 선물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으로 소중히 조개껍데기를 받았다.

"남자친구랑 나누어 가져요!"

린나의 폭탄선언 같은 말에 유우시의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했다. 부정하려 입술을 떼려는 찰나, 리쿠의 목소리가 유우시보다 한발 앞서 공기를 갈랐다.

"고마워, 린나 짱."

유우시는 자신보다 한참 몸을 낮춘 리쿠의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리쿠의 대답이 긍정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아이의 호의를 갈무리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린나는 이제 아이스크림 콘을 먹으러 가야 한다며 짧은 손인사를 남기고 모래사장 너머로 사라졌다.

리쿠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펴며 제 어깨로 유우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유우시는 여전히 붉어진 볼 위로 차가운 손등을 댄 채 린나의 뒷모습만 쫓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 들어가서 씻어야겠지?"

"안 씻을래."

"옷 다 젖었는데?"

"계속 여기 있고 싶어."

유우시의 목소리엔 도쿄에서는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어리광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돼? 이어지는 유우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리쿠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안 된다고 말하기엔 유우시의 눈동자가 보라카이의 윤슬보다 더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하지. 유우시는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더니, 손에 바닷물을 묻혀 리쿠의 얼굴 쪽으로 가볍게 흩뿌렸다. 리쿠는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번 닦아낸 뒤, 틈을 놓치지 않고 유우시에게 똑같이 물장난을 쳤다. 두 성인 남자의 유치하고도 찬란한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리쿠는 유우시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바로 옆방이었지만, 유우시의 방보다 조금 더 작고 아늑한 구조였다. 하루 종일 이어진 물놀이의 여파로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유우시는 리쿠의 침대맡에 걸터앉아 미지근해진 물로 목을 축였다. 잠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난 탓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지금 이대로 잠들면 분명 새벽에 눈이 떠져 괴로울 게 뻔했기에, 두 사람은 억지로 눈을 뜨고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배부르다…."

"원래 물놀이 후엔 라멘인데, 여긴 없네."

"그럼 리쿠는 필리핀에서 살아? 쭉?"

유우시의 물음에 리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쭉— 리쿠는 자연스럽게 유우시가 마시다 내려놓은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유우시는 리쿠 쪽으로 무의식중에 손을 뻗었다가, 찰나의 망설임 끝에 다시 거두어들였다.

"내일은 뭐 할까?"

리쿠의 물음과 유우시의 대답 사이에는 늘 적당한 틈이 존재했다. 유우시는 말 한마디를 뱉기 전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고심 끝에 툭 던지는, 상대의 애를 태우는 화법을 가졌다. 리쿠는 처음 몇 번은 그 침묵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단 하루 만에 유우시라는 사람의 속도에 완벽히 적응해 있었다.

"못 고르겠으면."

"후르츠 먹기."

"후르츠?"

"일본에서는 잘 안 먹는 편이라서."

"하루 종일?"

"근처 산책하기도 좋고."

"나 그래도 명색이 관광사 투어 가이드인데, 가이드가 하루 종일 산책만 해도 돼?"

"후기 잘 써줄게."

리쿠가 유우시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에…. 유우시는 그게 뭐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리쿠를 마주 보았다. 응? 대화 내내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던 리쿠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유우시는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리쿠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리쿠의 목에서 사레들린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리쿠는 눈앞에 놓인 생수병을 두고도 굳이 미니 냉장고까지 걸어가 새 병을 꺼내 마셨다.

"감기 걸렸나 봐."

되도 않는 핑계를 던지며 무거워진 공기를 환기하려 했지만, 유우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여기 엄청 더운데?"

결국 리쿠는 먹히지 않는 핑계를 뒤로하고 유우시를 제 방으로 돌려보냈다. 함께 있기엔 속도 울렁거리고, 종일 뙤약볕 아래 바닷가에 있었던 탓인지 실제로도 미열과 함께 몸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우시와 한 공간에 더 있다가는 제 마음의 빗장이 완전히 풀려버릴 것만 같았다.

방에 혼자 남은 리쿠는 불을 끄고 누웠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오늘 하루의 잔상들이 망막 위에 어지럽게 떠올랐다. 파도 속에 젖어 웃던 얼굴. 바람을 맞으며 기쁘다고 말하는 목소리. 같이 있고 싶다…. 조금만 더 보고 싶다는 갈증이 리쿠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유우시 또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리쿠의 방에서 풍기던 시원한 시트러스 향이 코끝에 남았는지, 아니면 제 몸에 밴 바다 냄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분명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나 정신은 되레 형광등 불빛처럼 형형하게 깨어났다. 아까 리쿠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지며 당황하던 기색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도쿄에서 누군가의 말에 흔들렸던 일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상이었다. 벽 너머에서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 들리는 듯해 유우시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리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일은 하루 종일 산책하며 과일이나 먹자는 터무니없는 제안을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유우시는 천장을 응시하며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바이크 뒷자리에서 리쿠의 허리를 감싸 쥐었을 때 전해지던 정직한 온기가 손바닥에 여전히 눌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타인의 온기가 이토록 무해하게 느껴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친한 사람의 다정함조차 때로는 부채처럼 무겁게 다가왔던 도쿄와 달리, 리쿠가 내어준 셔츠와 슬리퍼는 유우시의 메마른 마음바닥을 부드럽게 적시고 있었다.

문득 휴대폰을 확인하려다 유우시는 손을 멈췄다. 화면을 켜는 순간, 돌아가야 할 현실의 냄새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 뻔했다. 유우시는 휴대폰을 바닥으로 밀어버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빨리 내일 아침이 되어 리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모순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유우시는 그렇게 리쿠가 있는 쪽의 벽을 향해 몸을 웅크렸다.

 

 

 

마지막 저녁이 오기 전, 보라카이의 오후는 유우시의 말대로 오직 후르츠와 산책으로만 채워졌다. 거창한 액티비티는 없었지만, 그 어떤 투어보다 밀도가 높았다. 리쿠는 로컬 시장 귀퉁이에서 가장 잘 익은 망고스틴을 한 봉지 가득 샀다. 유우시가 딱딱한 껍질을 까느라 애를 먹자, 리쿠는 익숙한 손길로 껍질을 눌러 하얀 속살을 꺼내 유우시의 입에 넣어주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질 때마다 유우시는 자신이 도쿄의 말단 대리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다.

리쿠는 관광객이 없는 비밀스러운 숲길로 유우시를 안내했다. 울창한 야자수 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리쿠는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꺾어 유우시의 귀 뒤에 꽂아주었다. 유우시 진짜 예쁘다. 리쿠도. 응? 리쿠도 예뻐….

 

대충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리쿠는 소화도 시킬 겸 잠시 걷자고 제안했다. 목적지를 묻지 않았지만 리쿠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유우시는 그저 리쿠의 등을 이정표 삼아 묵묵히 따라 걸었다. 밤바람에 섞인 바디워시 향이 달콤하게 느껴질 즈음, 길 끝에서 낡은 십자가가 매달린 작은 교회가 나타났다.

리쿠는 교회에서 학생 때부터 일을 해 왔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리쿠를 잘 따랐고, 본인도 그게 좋아서 휴가 때면 아직도 종종 그곳에 들른다고 했다. 회상인지 뭔지…. 혼자 말을 이어가다 피식 웃는 모습에 유우시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곳에서 사랑에 빠지는 일 같은 건 자기한테는 일어날 수 없다고.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조금 과분한 일이라고. 그래서였을까. 유우시는 리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특히 저 십자가. 리쿠가 몸담은 저 견고한 신앙의 세계가 유우시에게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기독교인인 리쿠에게 자신 같은 존재가 결국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 도쿄에서 겪은 수많은 부정적인 시선들이 유우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우시랑 같이 도쿄에 가고 싶어."

"뭐?"

걸음을 멈춘 유우시는 노골적인 멸시를 담은 눈으로 리쿠를 쏘아봤다. 여행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리쿠는 그 눈동자를 끝까지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정적이 길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숨이 막히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내가 어떻게 믿어."

"유우시."

"리쿠가 갑자기 나 역겹다고 돌아서면 나는 어떻게 해?"

"아니."

나는 이런 생각 밖에 못 해. 유우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건 방금 떠오른 찰나의 의심이 아니라, 도쿄의 차가운 빌딩 숲에서 수천 번은 더 되풀이하며 끝을 본 결론이었다.

애초에 운명적인 만남이나 구원 같은 건 유우시의 인생에 허락된 선택지가 아니었다. 토쿠노 유우시는 제 삶에 그만한 낭만이 끼어들 틈을 단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나같은 사람들이 그쪽에서 어떻게 비춰지는지도 알고."

"나랑 그 사람들은 달라."

"뭐가 다른데."

"진짜 사랑을 아니까."

리쿠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순수한 확신이 유우시에게는 오히려 독처럼 다가왔다. 유우시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이미 그다음의 비극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마에다 리쿠가 믿는 그 고결한 사랑을 실제로 앓는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상할 정도로 치졸하고, 버틸 수 없을 만큼 처절해서, 이게 진짜라면 다시는 시작하고 싶지 않다는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게 이곳의 현실이었다.

"나는 여기에 온 유우시가 좋아. 내 말은 지금 너한테 빠졌다는 말인데."

"리쿠한테나 지금이지."

"응. 내가 욕심 부렸나 봐."

"리쿠는 돌아갈 곳이 있잖아."

그게 교회라고 말하고 싶은 거면 안 들을래. 리쿠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망치기 싫어…. 유우시는 고여 있던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내며, 멀어지는 리쿠를 따라잡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발을 뗐다.

이상하게 필리핀이 추웠다. 삼백육십오 일이 여름인 나라. 습한 열기가 피부를 감싸는 섬 한가운데 서 있는데도 유우시의 체온은 자꾸만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피부에 닿는 온도가 전혀 뜨겁지 않았다.

 

내가 없을 시간에 너는 분명 교회로 돌아갈 거라고.

그때도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있냐고.

유우시는 하지도 못 할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마 우리 지금쯤 키스했겠지

 

 

 

 

 

 

 

무작정 도쿄에 입성했다. 가이드 생활로 모은 돈이면 석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리쿠는 가장 싼 단칸방을 계약하며 전의를 다졌다. 안 되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 1년이라도 더 붙어 있을 작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보라카이의 기억이 울적함을 몰고 왔다.

"내일부터 바로 나올 수 있죠?"

"네, 가능합니다."

"가이드 경력이라니 특이하네. 어쩌다 하게 됐어요?"

"부모님 제안으로 해봤습니다."

"부모님이 대범하시네. 어린 애를 혼자 타국에 보내고."

하하. 리쿠는 사장의 말에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당장 내일부터 편의점 바이토가 시작이다. 후쿠이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라면 이골이 나게 했던 터라 자신은 있었다. 사장은 리쿠의 이력서를 챙겨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이 대범하시다니,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 아들의 안목을 위해 지갑을 열기보다, 그들의 아량이 얼마나 얄팍한지 증명하는 쪽이 더 빨랐을 테니까.

 

 

9년 전,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리쿠는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다.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 속, 찰나에 지나간 동갑내기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긴 것이 시작이었다. 흔한 댄스 영상이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성숙해 보이던 소년. 리쿠는 인사를 건네는 소년의 모습만 수십 번을 되감아 보았다. 단순히 친해지고 싶다는 갈망보다 훨씬 묘하고 강렬한 끌림이었다. 화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리쿠는 이것이 지독한 사춘기라 믿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같은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리 없으니까. 야한 비디오도 아닌데. 리쿠는 필사적으로 흔적을 지웠다. 목사인 아버지가 알게 되는 날에는 곧장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학교가 끝나면 숨죽여 영상을 보고, 교회에 가기 전에는 모든 검색 기록을 삭제했다. 초조함에 물어뜯은 입술이 형편없이 짓물러 터졌다.

밤새 기괴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화면 속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해도 몸은 즉각적인 신호를 보냈다.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폐부 깊숙이 눅눅하게 쌓여 갔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잦아졌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타인을 향해 속을 썩이는 스스로가 억울해 견딜 수 없었다.

새벽기도를 하러 가는 길, 소매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눈물을 훔쳤다. 주머니 속 휴지는 눈물에 절어 찢기고 구겨지길 반복했다. 흘러나오는 찬송가가 죄다 사랑 노래로 치환되어 들릴 때, 비로소 이것이 죄임을 자각해야만 했다. 그 사실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솔직하게 표출되는 마음을 외면하려 애쓰는 스스로의 비겁함이 미웠다.

하지만 인내에는 한계가 있었다. 100만큼 숨기려던 마음은 결국 101을 훌쩍 넘어서는 결국 아버지의 입에 올랐다.

"동성애?"

"그런 거 아니에요."

"네 마음 속에 사탄이 집을 지었구나."

리쿠의 뺨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재차 손이 치켜 올라갔을 때, 어머니가 끼어들어서야 폭력은 멈췄다. 집 안의 공기는 뜨겁다 못해 리쿠를 까맣게 태워버릴 기세였다. 심장이 요동치는 탓에 역한 토기가 밀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자 아버지가 뒤를 쫓아왔다. 아버지는 리쿠의 머리채를 잡아 변기 속에 처박았다.

눈과 코, 입으로 투명한 물이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무엇이 눈물이고 무엇이 변기 물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게 뒤섞였다. 간신히 고개를 끌어올렸을 때, 리쿠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이미 도망치고 난 후였다. 그 소년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그저 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매일같이 바다를 보며 등하교하던 길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바다가 무서웠다. 바다를 보면 소년이 생각나고 눈에선 변기 물이 흘러내렸다. 닦아내도 파인 도랑처럼 눈물은 끝없이 흘렀다.

아버지는 리쿠가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내쫓겠다고 선언했다. 가문의 수치. 우리 집에 너 같은 악마가 깃든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소리쳤다. 리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의 짐이 되는 것도 싫었지만, 어떻게든 이 섬을 떠나야겠다는 열망이 더 컸다.

하지만 지난 3년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소년의 잔상이 의식을 치고 들어왔다. 영상을 보던 기기들을 모조리 빼앗겼음에도, 소년의 목소리와 형체는 리쿠의 머릿속을 유령처럼 부유했다. 지독한 괴로움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보겠다고 볼륨을 최대로 키워 귀를 바짝 갖다 댔던 그 찰나의 순간들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웠다.

매일같이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가 말하는 사탄과 뇌리에 깊숙이 박힌 천사는 질리지도 않는지 리쿠의 머릿속에서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멈추고 싶어 주먹으로 머리를 때려보고 벽에 들이받아 보기도 했다. 앞머리로 차마 다 가리지 못한 시퍼런 멍들과 함께 리쿠는 필리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관광지라 그런지, 후쿠이의 그 서늘했던 바다와는 결이 달랐다. 거울 속 내 모습도 더 이상 변기 물속에서 허우적대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일을 잘한다는 주변의 칭찬과 나날이 유능해지는 가이드 실력에 리쿠는 생경한 자부심을 느꼈다. 결국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던 걸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감각은 사라졌지만, 그 소년의 잔상은 이제 기억의 수면 아래로 거의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바다에 뛰어들어도 심장은 고요하게 박동했다. 거칠게 몰아치던 파도도, 교복 소매를 적시며 바다를 피해 걷던 십 대의 마에다 리쿠도 이제는 죽고 없었다. 그 비극의 자리 위로, 떳떳하게 제 몫의 돈을 버는 어른만이 부활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토쿠노 유우시가 나타났다. 출구로 걸어 나오는 그를 마주한 순간, 리쿠의 눈에선 다시금 변기 물이 흘러넘쳤다. 수백 번 상상했다. 어딘지 허둥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절망적이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년은 기어코 수면을 뚫고 다시 솟아올랐다. 누군가를 열렬히 탐닉했던 기억은 마치 단 한 번도 곁을 떠난 적 없었다는 듯 리쿠의 귓가에서 히히덕거렸다. 꿈결처럼 다가가 말을 건네면 그는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손가락 끝부터 서늘한 저림이 타고 올라왔다. 입 밖으로 내뱉는 정제된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필리핀에 온 이유가 이거였구나.

리쿠는 허리에 감긴 하얀 손을 내려다볼 때마다 정체 모를 죄책감에 휩싸였다. 말없이 운전하는 내내 속이 뒤틀릴 정도의 멀미가 몰려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리쿠는 자신이 앞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마터면 수치스럽게 땀을 흘리는 꼴이나 보여줄 뻔했으니까. 허리를 붙든 손에 더욱 힘이 들어온다. 영혼은 바닷바람을 타고 이미 멀리 날아가 버린 듯했다.

문득 마주한 상대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이 서늘한 죽음만이 고여 있었다.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해맑게 인사하던 그 영혼은 도쿄에서 진즉에 바스러진 모양이었다.

애초에 닿지도 못했을 구원에 대한 미안함이 비릿하게 차올랐다.

나만이 점유한 친밀감 속에서 조금 더 눈에 띄고 싶었다. 새벽 기도는 뒷전이었다. 며칠을 온전히 함께할 생각에 들떠 밤을 설쳤다. 준비해둔 생소한 멘트들을 던졌고, 유우시는 속절없이 넘어왔다. 짜릿한 승리감. 함께 식사하고 디저트를 비우며 바닷가 앞에 마주 앉은 순간까지, 모든 것은 리쿠의 시나리오대로였다. 조용히 따라오면서도 손이 많이 가는 유우시의 특징은 리쿠에게 귀찮음이 아닌 권력이 되었다. 그게 좋았다. 신도, 아버지도 개입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지배하는 사랑은 완벽한 신성모독이었다.

아마 나는 아직도 기적을 꿈꿨나 보다.

 

모든 것을 감안하기로 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걸 거역할 재간이 없었다.

둘째 날, 함께 바다로 향한 순간부터 리쿠는 더 이상 보라카이의 마에다 리쿠가 아니었다. 어쩌면 열여섯 살의 소년으로 되돌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곁에 머물고 싶어 온갖 얄미운 핑계를 대야만 했다. 모래 위에 셔츠를 깔아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팔이 먼저 나갔다. 왜 그랬느냐는 자책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찰나의 감정에 뇌를 맡기자 몸은 자석처럼 이끌려 움직였다.

모래 범벅이 되고 소금물에 잔뜩 절여졌다. 여름이라서. 그런 구태의연한 착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보라카이는 일 년 365일이 내내 여름이었으니.

리쿠는 그것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밑바닥을 유우시에게 전부 꺼내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제가 품어온 고통과 흉터들. 그리고 유우시라는 존재로 인해 그 상처들이 새까맣게 타버릴 거라는 잔인한 확신까지 말이다. 그건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진실이 아니었다. 리쿠는 이미 과거를 통해 비밀이 어떻게 자라나 삶을 갉아먹는지 목격한 바 있었다. 스스로가 근사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리쿠는 유우시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망고스틴의 하얀 속살을 보며 묘한 정복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대리라는 직함도, 유우시를 짓누르던 피로함도 자신의 손 끝에서 지워지길 바랐다. 꽃을 꺾어 유우시의 귀 뒤에 꽂아줄 때, 리쿠는 제 눈앞의 풍경이 현실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유우시 진짜 예쁘다. 그 말은 찬사라기보다, 제 곁에 묶어두고 싶은 욕망이 흘러넘친 신음이었다.

하지만 저녁 공기가 바뀌었을 때, 리쿠는 제 안의 가장 견고한 성역이자 도피처인 교회로 유우시를 이끌었다.

"유우시랑 같이 도쿄에 가고 싶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리쿠는 깨달았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구걸이었다. 돌아오는 것은 경멸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리쿠는 그 차가운 눈빛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정적은 칼날처럼 리쿠의 살갗을 베어 물었다.

"리쿠가 갑자기 나 역겹다고 돌아서면 나는 어떻게 해?"

그 말은 리쿠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러왔다. 리쿠가 몸담은 신앙의 세계. 그 고결함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정상성의 폭력을 유우시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나는 다르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유우시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은 리쿠가 믿어온 낭만을 단숨에 비릿한 허상으로 만들었다.

"나랑 그 사람들은 달라."

진짜 사랑을 아니까. 리쿠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망설임 없는 확신은 사실 리쿠가 자신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유우시는 이 사랑의 언어를 독배를 마시듯 괴롭게 받아내고 있었다. 뭔데 그게…. 리쿠가 말하는 사랑이 구름 위의 이상향이라면, 유우시가 겪어온 사랑은 진흙탕 속의 비명이었다. 그 괴리감이 리쿠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기에 온 유우시가 좋아. 내 말은 지금 너한테 빠졌다는 말인데."

욕심이었다. 리쿠는 고개를 돌리며 제 발등을 찍는 듯한 자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이 모든 죄책감을 씻어줄 신의 품이 있다는 사실이 유우시에게는 얼마나 큰 박탈감으로 다가갈지 뒤늦게 깨달았다. 망치기 싫어…. 작게 들려오는 유우시의 낮은 읊조림이 리쿠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리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유우시의 체온이 닿지 않는 등 뒤가 지독하게 시렸다. 매년, 매월, 매일이 여름인 보라카이에서 리쿠는 처음으로 뼈가 시리는 한기를 느꼈다. 습한 열기는 더 이상 리쿠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유우시를 향한 제 간사한 확신이 그를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지독한 여름 속에 홀로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리쿠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유우시와 함께했던 짧은 여름이 끝났다. 손가락에 꼽힐 만큼 찰나였던 시간. 그사이 정성껏 쥐어본 한 줌의 모래 같은 추억이 기어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아아. 나는 드넓은 모래사장만큼이나 거대한 사랑을 바랐던 것일까. 리쿠는 욕심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채 끝없는 기도를 올렸다. 어째서 나의 이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지. 마음으로는 수천 번 유우시를 놓아주겠노라 선언했으나, 마치 누군가 악의적으로 방해라도 하는 듯 신은 리쿠의 처절한 참회에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도쿄의 일상은 권태로울 만큼 반복적이었다.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유우시에 대해 아는 게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변화 없는 유우시의 라인 프로필만이 공허하게 리쿠의 화면 속을 떠돌 뿐이었다. 편의점과 양꼬치 가게를 오가는 빽빽한 바이토 일과 속에서도 리쿠의 신경은 늘 바깥을 향해 있었다. 서빙을 하다가도 문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우시가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 헛된 기대가 리쿠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도쿄를 이렇게 허망하게 떠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내며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곳은 리쿠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간신히 당도한 유우시의 도시였으니까.

 

리쿠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마주 앉았다. 누군가는 청첩장을 내밀고, 누군가는 취직 성공담을 늘어놓느라 바쁠 자리였다. 보라카이에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기에. 그 정도의 소음은 감수하기로 했다. 리쿠의 귀국 소식에 도쿄 전역에서 동창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친했던 녀석들은 물론, 리쿠를 흠모하던 여자애들까지 합세해 술자리는 금세 열기로 달아올랐다.

"마에다 떴다!"

"리쿠 분위기 완전 달라졌는데?"

"잘 지냈냐? 몸은 왜 이렇게 좋아졌어."

"여자친구는? 부모님은 잘 계시고?"

고마워. 잘 지냈지. 아니야. 없어. 쏟아지는 질문에 기계적인 답변을 내놓던 리쿠는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마지막 질문만큼은 웃음으로 무마하며 넘겼다. 이자카야 내부가 소란해질 무렵, 리쿠는 환기라도 할 겸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곁을 따라 나온 유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도 그는 라이터 불만 켤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리쿠 역시 나란히 서서 허공에 한숨을 섞었다. 이러면 복 달아난다는데. 그럼 평생 유우시 볼 일은 없겠네. 담배를 문 입가로 자조 섞인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옆 테이블에도 손님이 차 있었다. 주인 없는 가방만 놓인 텅 빈 자리와, 그 맞은편에 앉은 앳된 대학생 한 명. 요즘 애들도 이런 데 오나. 나도 일본에 계속 있었으면 대학생이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앉자마자 눈앞에 생맥주 잔이 턱 하고 놓였다. 그때, 한 친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네 아버지 목사님이시지?"

"응."

"그럼 나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동성애 어떻게 생각해?"

이미 답이 뻔한 질문 아니냐는 핀잔들이 주변에서 쏟아졌다. 리쿠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조차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보의 일부인 것 같았다. 젖은 손을 대충 바지에 문지르며 대답을 고민하던 찰나, 익숙한 음성 하나가 리쿠의 고막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사쿠야, 우리 이따 망고 먹자."

"이제 맥주 한 모금 마셨는데 벌써 망고 타령이야?"

"망고가 어때서…."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려던 순간, 동창 중 한 명이 리쿠의 어깨를 붙잡으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엉겁결에 친구들의 눈동자 속에 갇혀버린 리쿠는 숨을 멈췄다.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와 눈앞의 시선 사이에서, 리쿠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직감조차 필요 없었다. 단 한 번에 알아챘다. 토쿠노 유우시의 매력 보이스. 절대 잊을 수 없었고, 희미해질까 두려워 몇 번이나 머릿속에 되새기며 붙잡았던 그 목소리. 리쿠는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가늠했다.

"왜 말이 없어?"

"매너가 없냐, 너네는."

리쿠는 쏘아붙이듯 대답하며 벌떡 일어나 유우시의 테이블로 향했다. 유우시는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맞은편의 사쿠야는 유우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머릿결 더 상한 것 같아. 유우시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휘저으며 사쿠야의 손을 쳐냈다. 보라카이 다녀오고 나서 염색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리쿠는 스쳐 지나가는 척하며 유우시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감지한 사쿠야가 턱 끝으로 신호를 보냈다. 유우시가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확인했다.

"리쿠…."

리쿠가 나직하게 뱉었다.

"오랜만이네."

유우시는 대답 대신 다시 사쿠야 쪽으로 몸을 틀며 중얼거렸다. 나 아직 반 잔도 안 마셨는데. 술에 뭐 탄 거 아니야? 말과는 다르게 유우시는 눈앞의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놀란 사쿠야가 유우시의 잔을 뺏어 들며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유우시는 혀가 꼬인 듯 웅얼거렸다.

"내가 방금 리쿠 귀신을 봤어."

리쿠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기억할 줄은 알았으나 이토록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일 줄은 몰랐다. 오히려 티 나게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마치 환영을 수차례 마주해온 사람처럼, 유우시는 눈앞의 실재하는 리쿠를 철저히 부정했다. 유우시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리쿠의 얼굴에 머물렀다. 예쁜 영혼은 이미 빠져나간 지 오래인지, 마주친 동공에는 생기 하나 없었다.

"리쿠는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유우시의 목소리가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긴 내내 여름인데, 여기는 너무 추워… 얼어 죽을지도 몰라."

뜬금없는 걱정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말 한마디에 리쿠의 심장 언저리가 시큰하게 저려왔다. 유우시는 도쿄의 빌딩 숲에서 스스로 마모되어 가면서도, 정작 보라카이의 뙤약볕 아래 있던 놈이 이 추위에 얼어 죽을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사쿠야가 어깨를 밀쳐내기도 전에 리쿠가 먼저 손을 뻗어 유우시의 팔목을 낚아챘다.

"죽을까."

리쿠의 목소리가 이자카야의 소음을 뚫고 유우시의 귓가에 정박했다. 유우시는 멍한 눈으로 제 팔목을 거칠게 쥔 구릿빛 손을 내려다봤다. 이 온기가 환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유우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황한 사쿠야가 리쿠의 팔을 붙잡았지만, 리쿠는 미동도 없이 유우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놓치면 정말 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으니까.

"나랑 나가자."

"싫어…."

"싫어?"

나 지금 겨우 얼어붙었는데, 너 때문에 다 녹아버리잖아….

유우시는 리쿠의 손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이자카야의 시끄러운 소음이 일순간 멀어지고, 오직 두 사람 사이의 지독한 계절감만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한여름의 잔상과 한겨울의 현실이 충돌하며 수증기를 내뿜었다.

리쿠는 유우시의 어깨에 팔을 감아 안은 채 밖으로 나왔다. 유우시는 기다렸다는 듯 리쿠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리쿠 냄새 나. 유우시가 슬그머니 리쿠의 주머니 속에 제 손을 집어넣었다. 손 시려? 응. 리쿠가 대답 대신 주머니 속에서 손을 맞잡으려 하자, 유우시가 멈칫하며 먼저 손을 뺐다.

"나 손에 땀 많아서."

"대박이네."

"뭐가?"

"나는 손 빼고 다 땀 많아."

리쿠의 엉뚱한 대답에 유우시는 언제 울었냐는 듯 헤실헤실 웃음을 터뜨렸다. 그 환한 얼굴을 보니 리쿠도 그제야 마음 한구석이 놓였다. 완전 보라카이 같아…. 유우시가 중얼거렸다.

"망고 먹으러 갈래?"

"아니."

"아까 먹고 싶어 하는 것 같더니, 아니었어?"

"필요 없어."

유우시가 리쿠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덧붙였다. 리쿠 봤으니까.

 

둘은 지하철역까지 한참을 더 걸었다. 유우시는 내심 후회했다. 술 마시지 말걸. 까딱하다간 오늘이라는 꿈같은 현실을 잊어버릴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리쿠와 맞잡은 손에는 절대 힘을 풀지 않았다.

"언제 가? 보라카이로."

"안 가."

"왜?"

"거긴 유우시가 없어서."

"...원래 없었어."

유우시가 말끝을 흐리며 웅얼거리자, 리쿠가 멈춰 서서 유우시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의미를 만들어 주고 사라졌잖아, 네가."

지하철 개찰구의 기계적인 비프음이 두 사람의 정적을 깨뜨렸다. 유우시는 역 안의 서늘한 공기에 몸을 떨면서도 리쿠의 손을 감싼 손가락 사이의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항상 사람을 그렇게 무방비하게 만들어."

유우시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서서 리쿠를 돌아봤다. 리쿠는 한 계단 위에서 유우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구릿빛 피부와 그 눈에 담긴 짙은 애정은 정말로 보라카이의 그 뜨거운 밤을 도쿄 한복판에 옮겨놓은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지금도. 나 술 다 깼어. 리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대사를 하니까."

유우시가 투덜거렸지만 리쿠는 그저 말없이 웃으며 유우시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손끝에 닿는 이마의 온도가 지나치게 생생해서, 유우시는 다시금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유우시 나 봐."

리쿠가 유우시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유우시는 리쿠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보라카이의 파도 소리 대신 지하철이 들어오는 육중한 굉음이 들려왔지만.

리쿠의 품 안은 여전히 여름이었고, 그 여름은 이제 유우시의 계절이기도 했다.

"환각 아니겠지?"

유우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리쿠는 유우시의 손을 잡아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코트 너머로 리쿠의 심장이 뛰는 진동이 유우시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원래 귀신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어?"

리쿠가 짐짓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우시는 대답 대신 리쿠의 가슴에 이마를 묻었다. 지하철이 역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우시는 리쿠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리쿠의 몸에서 풍기는 미세한 바다 내음과 체취가 유우시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전동차 안은 한산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어깨를 맞댔다. 흔들릴 때마다 몸이 밀착되었고, 그때마다 유우시는 움찔거리며 리쿠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유우시는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은 창문에 비친 리쿠는 여전히 보라카이 해변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반면 자신은 도쿄의 무채색 풍경에 동화되어버린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리쿠, 나 좀 변했지."

유우시가 자조적으로 물었다.

"어디가."

"좀 찌든 것 같아. 그때만큼 예쁘지도 않고, 맨날 술이나 마시고."

리쿠는 유우시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난 유우시만 보고 도쿄 사람들 다 예쁜 줄 알았어. 리쿠의 말에 유우시가 조용히 킥킥거렸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리쿠는 유우시의 어깨에 감았던 팔을 풀었다. 춥지? 금방 보일러 틀게. 리쿠는 두툼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유우시의 겉옷도 받아 정리하려 몸을 돌렸다. 뒤에 서 있던 유우시가 참지 못하고 리쿠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 리쿠의 등이 유우시의 뺨에 닿았다. 겉옷을 벗어버린 리쿠의 얇은 셔츠 너머로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우시는 리쿠의 등에 얼굴을 묻고, 떨어지기 싫다는 듯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응? 나 어디 안 가. 리쿠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우시는 리쿠의 품에 갇힌 채로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술기운과 애정이 뒤섞인 유우시의 눈동자는 아까보다 훨씬 더 연약했다. 리쿠는 제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유우시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젖은 속눈썹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안해서 그래... 리쿠가 자꾸 귀신처럼 보이니까."

유우시는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까치발을 들어 리쿠의 입술에 짧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쪽— 짧은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선명하게 울렸다. 예상치 못한 유우시의 선제공격에 이번에는 리쿠가 굳어버렸다. 늘 리쿠가 먼저 다가가고 유우시는 한 발짝 물러서던 관계였지만 지금의 유우시는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유우시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리쿠는 잠시 멍하니 유우시를 바라보다가 낮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망설임 없이 유우시의 얼굴선을 따라 부드럽게 감싸 쥐고 다시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아까의 가벼운 뽀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깊은 온기가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유우시는 리쿠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 여름 같은 열기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겼다.

"리쿠."

"응."

"가지 마."

 

"보라카이보다 여기가 더 덥게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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