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çucar amor Diário de bordo
푸
上
이 이야기는 68번째 대상, 토쿠노 유우시 씨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가파른 언덕길을 제 몸과 비슷한 캐리어를 끌며 힘겹게 올라가는 한 남자가 있다. 이름 토쿠노 유우시, 특이사항 첫사랑 사토 마키와 헤어진 지 6개월 차. 그것도 5년 동안 만났는데 잠수 이별 당함. 6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가끔은 울컥울컥 속에서 뭔가 차오르는 탓에, 주머니에는 손수건이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태어나기부터 도쿄 출신 도련님이 낯선 리스본까지 날아온 이유에는 뭐, 별것 없다. 전 남자 친구 흔적 따라왔더니 리스본이던데. 아아, 그러니까 진짜 흔적을 찾았다는 말은 아니고... 과거 나눈 대화를 보고.
[여기 가서 경기 같이 볼까?]
[유우시라면 분명 좋아할 거야.]
훌쩍. 그래, 맞다. 마키가 보낸 축구 경기장 링크 하나 때문에 리스본행을 선택했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하길래. 또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 (뻥이다.) 코를 킁 하고 삼킨 유우시가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도나 소피아의 집. 이 낯선 도시에서 유우시의 아늑한 홈 스윗 홈이 되어줄 곳. '길을 따라 올라오면 파란색 타일이 보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서의 기억이 즐거운 추억이 되기를.' 휴대폰에 적힌 숙소 안내 메시지를 다시 읽은 유우시가 마음을 잡는다. 그래, 이곳에서의 기억이 즐거운 추억이 되기를.
땀이 주르륵 흐르는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은 유우시의 눈에 파란색 타일이 들어오자, 걸음을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바다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파랗고 넓은 타구스강이 유우시를 반기는 듯 빛났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았을 핑계 다 버리고 사실만 말하자면, 처음은... 그래 맞다, 도피성 여행이었다. 믿기지 않는 걸 어떡해. 우리의 끝이 고작 잠수라니, 말이나 되냐고. 팅팅 부은 얼굴로 일단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낯선 땅에 발 얹었을 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었다.
넓은 강과 초라한 토쿠노 유우시.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리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도 달라질 건 하나 없는걸, 뭐. 5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건 아니지만 나는 원래 마키 없이 잘 살았고, 앞으로도 잘 살면 그만이다. 크게 숨을 들이킨 유우시가 중얼거린다. 그래, 별것 아니다. 토쿠노 유우시 파이팅.
쨍그랑
그러나 기껏 잡은 마음과 달리 상황은 유우시를 도와주지 않을 건지, 언덕과 이어진 좁은 골목에서 나온 소년과 부딪히고는 이내 쨍그랑, 소리가 난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마주쳤고 소년의 품에 있던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말. 깜짝 놀라 흔들리는 눈이 소년에게로 향했다. 우선, 부딪혔으니까 사과부터, 아 아니다, 유리병 배상부터 해 줘야 하나. 입을 벙긋거리는 유우시의 앞으로 소년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낯선 곳과 어울리지 않는 익숙한 말이었다. 에... 아니, 아니에요. 어색하게 손을 저으며 이쪽에서도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니, 소년이 살짝 웃는다. 힐끗 깨진 유리병으로 시선을 돌린 유우시가 입을 다시 열었다. 근데 혹시.
"이 유리병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 괜찮아요.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도 저랑 부딪혀서 깨진 거잖아요. 배상해 드릴게요."
"정말 괜찮아요. 이 유리병은 처분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도...."
"에... 정 그러시면 여기 한 번 찾아와 주실래요?"
네모난 작은 종이 명함. 유우시의 말에 곤란한 듯 살짝 턱을 긁더니 작은 종이를 건넨 소년이 쪼그려 앉아 유리 조각을 줍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큭큭. 찾아서 다행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끝으로 다시 꾸벅. 내리막길을 내려간 소년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소년이 떠나고 확인한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유리병과 각설탕이 그려진 낙서와 함께 짧은 안내가 적혀 있다.
'노란색 트램 24번을 타고 붉은 지붕과 좁은 골목 사이를 세 번 왔다 갔다 하면 돼요. 중앙 광장 푸니쿨라를 여섯 번 타도 됩니다.^^ 그치만 두 번째 방법은 비추천, 돈이 많이 들거든요.'
이게 뭐지.
Açucar amor Diário de bordo
노란색 트램 24번
붉은 지붕
그리고 골목을 세 번 왔다 갔다
죽고 싶다. 이것은 토쿠노 유우시의 소리 없는 아우성. 사람 많은 관광지의 뒤편으로 이동하는 24번 트램은 현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가는 길인지 훨씬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래,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분명 붉은 지붕들이 보이는 곳으로 간 건데, 막상 골목으로 들어오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이 헷갈렸다. 골목의 시작점에 서면 붉은 지붕이 보이다가,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안 보이고. 다시 나와서 확인하면 또 붉은 지붕이 있고. 바람에 살랑거리던 앞머리도 어느새 땀에 젖어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이게 맞나. 세 번이면 된다던 소년의 안내 문구와 달리 유우시는 지금 똑같은 골목을 여섯 번이나 헤매는 중이었다.
헉헉. 얼마나 걸었는지 유우시의 호흡이 거칠었다. 턱에 떨어지는 땀을 아무렇게나 닦고 잠시 걸음을 멈춰서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나가면 새로운 곳이 있지 않을까. 시야를 차단하니 놓치고 있던 소리들이 들려왔다. 빨래를 널기 위해 창문을 여는 소리와 트램이 지나가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올라오려는 짜증을 삼키고 가만히 태양 아래 소리를 듣던 유우시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쨍. 맑은소리와 함께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앞으로 여덟 걸음, 오른쪽으로 두 걸음, 거기서 한 번 더 오른쪽으로 열세 걸음. 발이 가는 대로 따라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쨍. 얇고 맑은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 보이지 않던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간판도 없고, 사람 그림자도 없는데 유리 너머 수십 개 병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이게, 무슨. 멍하니 가게를 바라보자,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나오는 이가 보였다. 품에 유리병을 소중히 안고는 어쩐지 편안해 보이는 사람. 유리병. 에... 작은 종이에 낙서 돼 있던 그 유리병. Diário de Bordo, 저기인가.
*
"유우시 군 오셨어요?"
가게로 들어가니 아까 본 소년이 카운터에서 유리병을 닦고 있었다. 그러고는 알려 준 적 없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유리병을 하나 꺼내온다. 곧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입구가 좁고 넓은 유리병 안에는 각설탕이 반 정도 차 있었다. 종이에 그려져 있던 낙서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며 유우시가 유리병을 가리키고는 물었다. 이 유리병은 뭐고, 각설탕은 왜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자 두 눈을 꿈뻑꿈뻑. 작게 웃은 소년이 유리병을 내밀며 그런다.
"유우시 군이 제일 잘 알 텐데요."
"네?"
"이 유리병은 유우시 군의 것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소중히 보관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게 대해주시고요."
유리병은 각설탕을 채울 수도 있고, 비울 수도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꼭 누군가를 만나야 해요. 소년은 한 번 더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장소들을 나열한 건지, 종이 안에는 이번에도 역시 낙서와 글이 적혀 있었다. 우선,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유우시 군이 궁금해하는 한 가지를 이곳에서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주머니에서 각설탕 하나를 꺼낸 소년이 유우시의 유리병으로 조심스럽게 떨어트리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각설탕이 유리병에 떨어졌다. 하나의 각설탕이 세 개가 된다. 눈으로 봤지만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흠칫한 유우시가 유리병으로 손을 조심스레 뻗다 멈춘다.
"이렇게 하시면 돼요."
"...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마주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주면 끝이에요."
"그게 다예요?"
"네, 어려울 것 없어요."
어정쩡하게 뻗어있던 유우시의 손을 보던 소년은 유리병을 살짝 앞으로 밀었다. 몇 번 해 보면 알 거예요.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병을 조심스레 안은 유우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게 정말 내 유리병이 맞나. 이 유리병과 각설탕으로 뭘 하라는 거지. 그러는 사이, 뚜껑이 닫힌 유리병 위로 각설탕 두 개를 올려둔 소년은 이내 할 이야기가 끝났는지 손을 내리고는 활짝 웃는다. 어려운 건 정말 하나도 없어요. 제 할 일은 이제 끝났네요. 유우시 군은 이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친절해 주기만 하면 기쁜 일이 생길 테고요. 그럼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됐어요. 바이바이, 유우시 군. 유리병을 소중하게 대해 주세요. 우리는 또 만날 거예요.
쨍ㅡ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 추억이 가득 담긴 물건, 최고의 빵집. (^_^)'
한 번 더 맑은소리가 들리고는 유리병을 조심히 들어 닦는 소년의 모습이 연기와 함께 희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의 흐름이 보이는 하얀색 벽으로 가득 찬다. 내가 홀리기라도 한 건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연속으로 펼쳐지자, 품에 안은 유리병을 내려다본 유우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반보다 조금 덜 찬 깨질 것 같은 유리병. 그리고 작은 각설탕 두 개. 아아ㅡ 진짜네. 진짜구나. 리스본에는 유리병 귀신도 있나. 놀라 다리에 힘이 쫙 빠진 탓에 유우시가 벽을 타고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꿈뻑꿈뻑. 멍하게 유리병과 각설탕을 바라보면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유우시 군이 궁금해하는 한 가지를 이곳에서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이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친절해 주기만 하면 기쁜 일이 생길 테고요.
우선,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요?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 주머니에 구깃구깃 접어둔 종이를 꺼내 펼쳐보니 소년이 말한 나무와 다음 목적지인지 모를 장소의 힌트가 있었다. (또 이상한 졸라맨 낙서까지.) 내가 궁금해하는 한 가지? 지금 상황에서는... 솔직히 마키가 이별을 선택한 이유밖에 없는데. 아,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 이유. 반쯤 차 있는 유리병 안에 각설탕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풀린 다리를 통통 친 유우시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가 볼까. 소년이 귀신처럼 무섭게 생기지도 않았고, 저주도 아니고 기쁜 일이 생긴다는데 해 보지, 뭐. 마법처럼 이 도시가 나를 도와주려는 걸지도 모르고. 또...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유리병도 엄청 예뻤고, 나 말고도 유리병 안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중얼중얼. 길을 확인한 유우시가 언덕을 내려가며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도 되는 괜찮은 이유를 만들어 나열한다. 눈에 들어오는 타일 하나에 이유도 하나. 중간중간 깨져있는 타일은 제외. 이유가 오십 개에 다다랐을 때쯤, 유우시의 걸음이 멈췄다. 다른 바닥과 달리 비어있는 하나. 여기만 없네. 타일을 따라 생각을 이어가던 유우시의 생각이 한순간에 가루처럼 사라졌다. 타일이 아예 깨져버린 건지, 뭔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바닥에 고개를 드니 평평한 길과 철도가 보였다. 내려오는 건 금방이네. 어쩐지 조금 억울한 건 덤으로.
철도 맞은편에는 유리병을 안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얼마나 서 있던 건지 양쪽 뺨이 붉게 물든 상태로 트램 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시가 안고 있는 깨질 것 같은 입구 좁은 유리병과 달리 남자의 품에 있는 유리병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이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지, 좀 전에. 어떻게 했더라. 마주 보고 반갑게 인사하기. 그리고 각설탕을 유리병에 넣어주면 됐던가. 또 다른 유리병을 안은 남자를 보고는 앞서 소년이 보여 준 행동을 되짚어본 유우시였다. 고민하다 맞은편으로 향하기 위해 발을 떼려는 사이, 빵ㅡ 이십 분 간격으로 돌아오는 24번 트램의 경적이 울렸다. 철도를 긁으며 오는 소리에 남자가 걸음을 뗀다. 에, 잠시만, 그러니까. 트램이 도착하기 전에는 인사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Olá!"
빠앙ㅡ 한 번 더 울리는 경적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고 유우시가 크게 소리쳤다. 올라, 일본어로는 곤니치와. 남자의 시선이 금세 유우시에게 향한다. 허공에 머물던 두 시선이 마주친다. 트램이 들어오며 시야를 가리는 그 짧은 틈 사이, 남자가 웃는 것 같았다. 쨍, 쨍. 맑은소리가 두 여 번 들리더니 도착한 트램에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의 모습에 괜히 민망해진 유우시가 귀를 살짝 만지며 몸을 돌렸다. 인사는 했으니까 됐겠지. 소년의 행동을 되짚은 것과는 달리, 쪽팔림에 다음 단계를 완전히 잊어버린 유우시였다. 거기서 소리를 지르긴 왜 질러.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방금 행동을 떠올린 유우시가 머리를 털고는 급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다음 트램 타지, 뭐.
"Olá"
급히 걸음을 옮기는 유우시의 뒤로 낯선 목소리의 인사가 들렸다. 올라. 고개를 돌리니 맞은 편에 있던 남자가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가리고는 서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우시가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남자는 또 웃긴지 큭큭. 이내 손가락으로 유우시의 동전 지갑을 가리키고는, 일본인이에요? 묻는다.
"...에? 어떻게."
"저도 일본인. 똑같은 지갑이네요."
아. 지난 여름 마키가 준 동전 지갑이었다. 일본에만 들어온 디자인이랬나, 그랬던 것 같다. 유우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올라 말고, 곤니치와. 풉. 큭큭도 아니고 풉. 뜨거운 태양에도 지지 않을 열기를 가진 남자는 여전히 굳어 인사만 하는 유우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터진 웃음을 어떻게든 삼키려고 곤니치와, 하면서 유리병에 쨍, 쨍, 쨍. 유우시의 유리병 안으로 하나의 각설탕이 세 개가 되어 떨어진다.
"죄송해요, 인사하신 건데 웃어서."
"아... 아뇨, 괜찮아요. 저야말로... 아까 죄송해요."
"인사해 주신 거잖아요. 저는 좋았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는 혼자 온 거예요?"
"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각설탕을 쥐고 있던 손을 몇 번 털고는 다시 한번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마에다 리쿠라고 합니다."
"토쿠노 유우시예요."
"괜찮으시면 같이 갈래요?"
"네?"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 아닌가."
종이에 적혀있던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 리쿠 역시 그곳이 적혀있었는지 조심스레 함께 가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나으려나. 잠깐 고민한 유우시가 좋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쿠가 다시 트램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다음 트램 말고, 저거 같이 타요. 사십 분 뒤에 오는 트램 타고 가야겠다. 쪽팔림에 도망치려던 유우시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리쿠의 모습에, 이번에는 유우시가 큭큭 웃음을 흘린다. 괜히 마음이 붕뜬다.
*
미라두루 데 산타 루지아. 크고 높게 올라가 있는 나무가 있는 곳. 이름 없는 카페에서 풍기는 커피 향이 공기를 타고 돌아다니며 코를 간지럽혔다. 조심스레 유리병을 아래에 내려둔 유우시가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슬쩍 리쿠를 바라봤다. 어색할 틈도 없이 바쁘게 이동한 덕분인지 알고 지내던 사람 같네. 옆에 가만히 서서 지도를 확인한 리쿠가 고개를 돌려 유우시를 바라본다. 또 눈이 마주친다. 쨍. 유우시의 유리병 안으로 각설탕 하나가 떨어졌다. 여기부터는 그냥 사람들 따라가면 될 것 같아요. 리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우시가 유리병을 다시 안았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이와 동행하고 있다니. 이상하면서도 즐겁다.
느릿느릿 저절로 느려진 걸음에도 리쿠는 재촉 한 번 하지 않고 속도를 맞춘다. 천천히 걷는 유우시의 옆에서 살짝 웃음을 흘린 리쿠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작은 가판대 앞을 가리키고는 조금 상기된 톤으로 말했다. 이거 먹어 봤어요? 설탕이 묻어있는 작은 과자. 리스본에 와서 한 게 유리병 받은 것밖에 없어서요. 간식 같은 건 아직 안 먹어 봤어요. 고개를 젓자 리쿠는 이내 잠시만 기다리라며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리쿠의 품에는 포장된 과자가 들려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설탕이 묻어있는 얇은 과자를 내밀고는 먹어 보라며 또 웃는다. 쨍. 유우시도 웃음이 터진다.
"먹어 봐요, 엄청 달아요."
"먹어 봤어요?"
"나오기 전에 하나 먼저 먹어 봤어요."
"달면 얼마나 달다고."
조심스럽게 과자를 받은 유우시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엑. 리쿠의 말처럼 엄청나게 단 과자가 유우시의 혀를 때렸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극강의 단맛에 흠칫 떨며 인상을 찌푸리자 리쿠가 주저앉을 기세로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엄청 달다니까. 입에 남은 단맛을 마저 삼킨 유우시가 리쿠에게 과자를 내밀었다. 리쿠도 먹어요. 그리고는 또 엑. 이번에는 리쿠가 표정을 찡그리자 유우시가 큭큭 웃는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폐를 간지럽힌다. 쨍, 쨍, 쨍.
한참을 웃던 리쿠와 유우시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한쪽에는 유리병이, 또 다른 한쪽에는 과자 봉투를 들고 사람들을 따라 올라가니 정말로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커다란 나무와, 음. 커다란 나무. 종이에 쓰여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하게 무언가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이게 뭐지. 리쿠와 유우시가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지만 역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늦었나. 턱을 긁은 유우시가 벤치에 앉자 리쿠가 그 옆자리를 채운다. 늦었나 봐요. 그러게요. 벤치에 앉아 작게 접은 종이를 꺼내 확인하니 문구가 달라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
'Miradouro de Santa Luzia, 추억이 가득 담긴 물건, 최고의 빵집. (^_^)'
화요일과 토요일에만 열리는 시장이 있어요. 28번 트램 타면 금방 가요. 벤치에서 한참을 이야기하던 리쿠와 작별 인사를 할 때, 리쿠가 알려 준 장소였다. 선물하는 거 좋아하면 잘 맞을 것 같아서. 여행 왔으니까, 그쵸? 시원한 입매로 웃은 리쿠의 얼굴이 왜인지 쉽게 잊혀지지 않았던 게 이유였으려나. 긴 여행 일정에도 사람들이 없는 곳만 다니던 유우시가 처음으로 28번 트램에 몸을 실었다. 유리병 가게로 향하던 24번 트램과 달리 28번 트램에는 빼곡히 사람들이 차 있었다. 어쩐지 벌써 조금 기가 빨리는 느낌.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한쪽 품에 유리병을 안은 유우시가 창밖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는다.
규모가 생각보다 더 큰 벼룩시장. 시장의 첫 느낌이었다. 옛날 DVD와 예쁜 접시, 크기가 다양한 유리병. 마그넷, 옷. 엄청 다양하게 팔아서 선물용으로 주기 좋은 것들 많을 거예요. 리쿠의 말대로 정말 다양하게 끝도 없이 이어진 시장에 유우시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에... 대박이다. 찬찬히 둘러보던 유우시가 마그넷 파는 가게에서 걸음을 멈췄다. 선물 같은 거 사 갈까, 그래도 여행인데. 좋은 풍경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니 마음에도 여유가 다시금 살아난 건지. 이런 와중에도 선물 주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좋은 걸 보니 잊으려던 마키 생각도 저절로 드는 게, 참.
이건 마키가 진짜 좋아하겠다. 마그넷 옆에 올려져 있는 얇은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여행 갈 때마다 항상 마키 선물은 잊지 않고 사 갔는데. 선물을 줄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마키 생각에 유우시가 짧게 실소를 터뜨린다. 이제는 주지도 못하는데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 건지. 팔찌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놓은 유우시가 마그넷 몇 개를 사고는 발걸음을 뗐다. 마키는 이곳에 두고 가자, 그리 생각하면서 한 걸음씩.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 아래에서 숨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던 유우시가 근처 벤치에 앉았다. 고개를 돌리면 아까까지 고민했던 마그넷 파는 곳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또 멈춘다.
가족과 함께 온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혼자 다니는 사람. 속으로 쓸데없이 마그넷 앞에서 멈춘 사람들의 수를 세고 있으니 한참을 자리에 서서 고민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보였으려나. 또 한 번 웃음을 흘린다. 신기하다. 도쿄만 벗어났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네. 유리병을 들어 이리저리 확인하면 각설탕이 데굴데굴 구른다. 이건 진짜 뭘까. 뭔가 일어날 것 같은데 일어나지 않고, 말도 안 되는데 자꾸만 각설탕 개수는 달라지고. 데굴데굴. 유리병 너머로 느긋하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울렁이며 보였다.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이자 멈칫한 유우시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째 리쿠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계속 이렇게 되는 건지. 다니는 곳마다 리쿠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리쿠를 자꾸만 찾는 스스로도 신기한 유우시였다. 손에 뭔가를 들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리쿠. 반가운 마음에 또 걸음이 리쿠에게로 향한다.
"리쿠."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리쿠의 고개가 유우시에게로 향한다. 놀란 눈에 또 괜히 즐거워진다. 여행지에서 친해지는 기분이 이런 건가? 낯선 곳에서 조금은 낯익은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에 괜히 살짝 들뜨자 리쿠도 반갑게 웃으며 이름을 불러왔다. 잘그락. 동그래진 눈으로 유리병을 확인하니 각설탕이 또 늘어나 있었다. 리쿠 보니까 각설탕이 또 늘었어요. 신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면 리쿠가 유리병을 콕콕 손가락으로 치더니, 대박 유리병이 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해 댔다. 구름에 둥실 뜬 기분이 든다. 되게, 되게 반갑네.
"바로 다시 만날 줄 몰랐어요."
"만나서 다행이에요. 안 그러면 억울할 뻔했어요."
"네?"
"시장 입구에서 한참 기다렸거든요."
그러고는 큭큭.
"그건 뭐예요?"
"선물이에요. 유우시도 뭐 많이 샀네요."
"네, 저도 선물로."
해맑게 웃으며 산 선물을 자랑하자, 리쿠도 자신이 산 선물들을 보여 줬다. 마그넷과 옷, 그리고 팔찌. 마키 생각에 살까, 말까 하던 그 팔찌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다시 떠오르는 마키 생각에 갈무리되지 않는 표정을 억지로 숨기는 유우시였다. 팔찌 예쁘네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 리쿠가 팔찌를 꺼내며 그런다.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사길 잘했다. 예쁘죠. 유우시 주려고 산 거예요. 꿈뻑꿈뻑. 에? 할 말을 잃은 유우시가 리쿠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잠깐 알게 된 사람에게도 이렇게까지 마음을 쏟을 수가 있나. 놀라 굳은 유우시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리쿠가 팔찌를 건넸다. 어, 음. 그러니까.
"... 저요?"
"네,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도."
"여행에서 만난 친구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
"얼마 안 해요."
가볍게 덧붙인 말이었는지 리쿠가 시원하게 웃었다. 받아든 팔찌를 보니 신기하게 아까와는 달리 마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나. 한참을 우물거리던 유우시가 입을 열고는 고맙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잘그락, 쨍, 쨍. 유우시의 유리병에 각설탕이 늘어났다. 리쿠가 넣지도 않았는데 늘어난 각설탕은 자기들끼리 붙어 굴러다니기 시작한다. 귀 끝이 붉어진다. 더운 열기가 폐 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팔찌를 살짝 내려다본 유우시가 고개를 들었다.
"... 점심 먹었어요?"
"아직요."
눈을 깜빡이는 리쿠 앞에서 잠시 입술을 깨물던 유우시가 시선을 피하고는 웅얼거린다.
"저도 아직인데."
속 보였으려나. 괜히 간지러워 팔 부근을 살짝 긁으며 덧붙인다. 근처에 뭐 많더라고요. 같이 먹자는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꼴이라니. 이제는 얼굴까지 붉어진 유우시를 바라보던 리쿠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먹으러 갈래요? 혼자는 좀 심심할 것 같은데. 유우시가 한참을 입안에서 굴리던 말을 리쿠는 자연스럽게 뱉는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인 유우시가 발걸음을 뗐다. 목적지는 모르겠고 일단 직진. 붉어진 귀를 살짝 만지며 앞서가는데 금방 리쿠가 걸음을 따라잡는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아, 그런 건 아닌데. 대답하려는 찰나, 몰려든 인파에 어깨가 부딪히고 손등이 스친다.
스쳤다고 말하는 게 맞나? 그냥 살짝. 다른 사람의 손등인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떨어진 정도. 화끈 달아오르는 손등에 걸음을 살짝 멈춘 유우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방금 뭐지. 손등을 쓸며 리쿠를 바라보면 아무렇지도 않은지 괜찮냐며 입 모양으로 물어보고 있다. 끄덕, 시선을 돌린 채 거리를 조금 더 가까이한 유우시가 애꿎은 유리병만 안는다. 아, 진짜 왜 이러지. 그러니까, 좀 이상했다. 도쿄에서 벗어나듯이 도착한 리스본에서는 믿기지 않은 일들만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신경 쓰이는 것도, 고작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사람과 동행하는 것도. 도쿄에서의 유우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인데. 눈앞에 있는 리쿠에게는 왜 자꾸만 나도 모르는 행동들만 나오는지.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 유우시가 살짝 숨을 삼킨다. 더워서 그런가. 가까이 붙어 걷는데 쨍, 쨍, 쨍. 연달아 유리병 안으로 각설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방금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인사도 안 했는데. 놀란 유우시가 유리병을 내려다보면 아까보다 훨씬 많은 각설탕이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 왜 이렇게 늘어."
작게 중얼거리자 고개를 돌린 리쿠가 묻는다.
"뭐라고 했어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한번 유리병을 안은 유우시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리쿠를 바라봤다. 뭔가, 좀... 이상했다. 그러니까, 왜 부끄럽지.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최고의 빵집. (^_^)'
종이에 적혀 있는 곳으로 가면 항상 종이의 내용이 달라진다. 벌써 두 곳이나 찾은 유우시의 종이에는 기존에 적혀 있던 내용과 달리 유우시가 간 장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포르투갈, 그것도 유우시가 있는 리스본은 에그타르트가 유명했다. 최고의 빵집이면, 아무래도 마지막 장소는 에그타르트 파는 가게일 것 같은데. 숙소에 누워 종이를 확인한 유우시가 휴대폰을 들었다. 포르투갈 에그타르트, 포르투갈 에그타르트 가게. 포르투갈에서 제일 맛있는 에그타르트. 음... 그리고 리쿠.
점심만 같이 먹자던 리쿠의 말과는 다르게 시장에서도 종일 리스본을 돌아다녔다. 마지막 장소는 어디일까요. 그렇게 말하는 리쿠를 보던 유우시가 휴대폰을 내민 게 토쿠노 유우시의 폰에 마에다 리쿠가 있는 이유. 길던 낮이 지나고 어둠이 찾아온 거리에서 아쉬운 듯 인사하는 리쿠를 그냥 보내자니 뭔가 아쉽더라고. 조금은 부끄러웠던 밤을 떠올린 유우시가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 위로 올린 손이 한참 고민하더니 이내 전송 버튼을 누른다.
[리쿠, 마지막 장소 찾았어요?]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유우시는 휴대폰을 뒤집어 침대 위로 던졌다. 겨우 메시지 하나 보냈을 뿐인데 심장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건지. 처음 연애하는 중학생도 아니면서. 10초를 못 참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을 때, 띠링. 화면 위로 리쿠의 답장이 떠 있었다.
[아직 못 찾았어요.]
[같이 갈래요?]
리쿠의 답장을 확인한 유우시가 기분 좋은 비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또 유리병 안으로 각설탕 하나가 떨어진다. [중앙 광장에서 볼까요?] 짧게 답장을 보낸 유우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지 않게 중앙 광장으로 내려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으니까. 띠링. 리쿠에게서는 금방 답장이 돌아왔다.
[중앙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큰일 났다.
또 신난다.
*
[리쿠, 저 지금 가고 있어요.]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확인한 유우시의 표정이 굳었다. 신난 건 전생이었나 봐.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휴대폰에는, 리쿠에게서 온 짧은 한 줄의 연락뿐이었다.
[유우시.]
에,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문자 아닌가.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에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도 모른다. 분명 낮에도 지나온 길인데 해가 기울자 모든 풍경이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익숙했던 길이 한순간에 낯설어지자 괜히 불안해진 유우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할걸. 아니면 숙소 주소라도 말해둘 걸 그랬나. 애꿎은 후회만 늘어났다. 품 안의 유리병을 끌어안은 채 걸음을 재촉하던 유우시가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또 사라지면 어떡하지. 이유 없이 마키가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사토 마키. 리쿠 역시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누군가를 이렇게 빠르게 의지해 본 적이 있었나. 겨우 며칠 만난 사람인데도, 왜 이렇게까지 불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초조함에 반비례하듯, 걸음이 빨라진 유우시가, 골목 끝 갈림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숨이 가빠진 줄도 모르고. 헉, 헉.
쨍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짧은 사이, 갈림길 한쪽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유리병을 처음 받은 날 들었던 맑은소리에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가 울린 쪽으로 향했다. Diário de Bordo, 오래된 나무 문에서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년이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미소로 유우시에게 손을 흔드는 익숙한 듯 낯선 소년. 소년이 외쳤다.
"유우시 군, 다시 만나서 기뻐요!"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간 유우시가 입을 열었다.
"정말 또 만났네요."
"그럼요, 우리는 다시 만난다고 했잖아요."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이 유우시의 유리병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새로운 각설탕이 벌써 이만큼 찼네요. 유우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막... 늘어나는 것에 비해 차는 것 같지도 않던 유리병에 새로운 각설탕이라니. 고개를 갸웃거린 유우시가 물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이유가 있나요?
"아, 다름이 아니라 의뢰가 완료되었거든요."
"... 의뢰요? 아직 마지막 장소도 못 찾았는데."
"네, 유우시 군의 유리병이 더는 위태롭지 않잖아요."
"무슨 말인지, 잘..."
"이미 찾았는걸요."
"68번째 의뢰인, 사토 마키 군 의뢰 완료."
"..."
"이제는 돌아가도 좋아요."
유우시 군이 원하는 곳 어디든, 누구에게 돌아가고 싶든, 전부 유우시 군의 몫이에요.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최고의 빵집? ^_^'
돌아가세요.
돌아가 보세요, 유우시 군.
유우시 군이 원하는 그곳에는 찾던 답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Chegada do alvo da missão, rapaz T
@_^
안녕하세요. 유리병의 모양에 따라 매칭되는 경우, 정해진 각설탕의 개수는 무한대가 됩니다. 대상의 선택에 따라 의뢰인의 의뢰 역시 다른 결과를 주기도 합니다만, 이번 의뢰는 대상의 성장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존 유리병에 있던 각설탕이 줄기 전까지는 다른 각설탕을 아무리 넣어도 늘어나지 않도록 해 둔 설정에 오류가 생겼거든요. 이번 의뢰 같은 경우 기존에 있던 각설탕이 줄어듦과 동시에 새로운 각설탕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특수한 상황에 의뢰인이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의뢰를 완료할 수 있었고요.
대상자 토쿠노 유우시 군은 이제 괜찮습니다. 더는 유리병에 금이 가지도 않고, 깨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위태롭지도 않습니다. 유우시 군과 매칭된 M군의 유리병도 꽤 특별했습니다. 각설탕이 채워지는 속도가 비슷했거든요. 크기도 모양도, 넓이도 깊이도 전부 다른 두 유리병이 채워지는 속도가 비슷하다니. 저도 이번 매칭은 꽤나 놀라웠습니다. 음, 의뢰인 사토 마키 군은 안녕하신가요? 가지고 간 유리병은 마음에 드실까 모르겠네요. 이곳에 두고 가신 오래된 유리병은 창고 아주 깊은 곳에 두었답니다. 쉽게 찾지도 못하게 해뒀으니, 의뢰인도 부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Diário de Bordo
68번째 의뢰인, 사토 마키 군 의뢰 완료.
이 이야기는 68번째 대상, 토쿠노 유우시 씨의 이야기입니다.
下
어려울 건 없어요.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멍한 표정으로 소년만 바라보자,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알 수 없는 거예요. 유우시 군이 지금 떠오르는 장소가 답일지도 몰라요. 소년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앞머리를 살짝 흔들고 간 바람은, 그대로 유우시의 속까지 뒤집고 사라진다.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는 건 어떡해.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 마키가 의뢰인이라는 말은 또 뭔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 말들뿐이었다. 유우시는 한참 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품에 안은 유리병을 봤다가, 다시 끌어안았다가. 힐끗 소년을 바라본 유우시가 낮은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 여기 있는 각설탕은 새로운 각설탕이라는 거죠?"
"네, 기존에 있던 각설탕은 이제 몇 개 안 남았어요."
"돌아가고 싶은 곳..."
"제일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되고요."
그러니까, 그게 어딘데? 속으로 받아친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뭘 물어봐도 같은 답을 해 줄 것 같아서.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장소들은 죄다 도쿄, 공항, 숙소, 마키가 말했던 경기장. 답이 아닌 것만 같은 곳들인데. 또다시 조용해진 유우시를 힐끗 바라본 소년은 재촉조차 하지 않은 채 손수건으로 유리병을 닦기 시작했다. 유우시 군이 혼란스러울 거 잘 알아요. 낮은 목소리로 또 한 번 달래며,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우시가 유리병을 의자에 올려두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리쿠에게 근처에서 기다려 줄 수 있냐고. 맞다.
리쿠. 리쿠랑 만나기로 했던 곳. 순간 유우시의 표정이 굳었다. 잊어버릴 것도 따로 있지.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와,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쿠 생각을 하니 방금까지 멍했던 느낌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깬 느낌. 이럴 때가 아니구나. 부산하게 나갈 채비를 하니, 소년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떠오르는 곳 하나는 있죠? 다급하게 유리병을 안는 유우시를 잠깐 붙잡은 소년이 닦고 있던 유리병을 들어 유우시에게 보여 주고는 말했다. 가득 찬 유리병이에요.
"가득 찬 사람은 덜어낼 줄 모르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는 옆에 병을 들어 올려서는.
"비어 가는 사람은 비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빤히 보는 유우시 앞으로 소년은 새로운 종이 하나를 건넸다. 가고 싶은 곳 떠올린 걸 축하하는 의미로 이건, 유우시 군이 답을 찾은 순간에 읽어보세요. 그러고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밝게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든다. 얼른 가 보세요. 조금 더 있으면 늦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큭큭. 이해되지 않는 말에 또 한 번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던 유우시가, 소년의 웃는 모습을 보고는 살풋 웃었다. 아, 진짜.
문을 연 유우시가 거리로 향했다. 뒤에서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배웅해 주고 있었다. 바이바이, 유우시 군.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를 뒤로 한 유우시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한다. 자꾸 사람을 뛰게 만드네. 투덜거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피실피실. 리쿠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유우시의 등을 자꾸만 밀었다. 빨리 와, 빨리 와. 빨리 가.
[늦으면 설탕 과자 또 살 거예요.]
큭큭.
Açucar amor Diário de bordo
"리쿠!"
호흡을 몇 번 고른 유우시가 소리쳤다. 어째 대낮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해가 질 때쯤 지켜진 건지. 있을 법한 곳을 다 둘러봤지만 외침과 달리 리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버스킹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 들어가 확인했다가, 벤치에 앉아 노을을 보는 사람들을 한 번 봤다가. 그래도 보이지 않는 리쿠 모습에 괜히 입술을 깨무는 유우시였다. 너무 늦었나? 기다려 달라고 했다고 꼭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을 텐데. 절로 조급해지는 마음에 휴대폰을 든 유우시가 메시지창을 열었다. [리쿠, 혹시 갔어요?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전송 버튼을 누를까 말까, 보내도 괜찮겠지. 고민하는 짧은 사이였다.
"유우시?"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작은 종이봉투와 함께 유리병을 안은 리쿠가 보였다. 종이봉투를 흔들면서 웃으며 다가오는 리쿠 모습에, 유우시가 잠깐 숨을 멈췄다. 어, 음. 이마에 맺힌 땀을 아무렇게나 닦은 유우시가 리쿠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제가 길을 좀. 미안해요. 민망한 건지 뭔지, 붉어지는 얼굴을 살짝 가리고는 고개를 드니 리쿠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과 안 해도 돼요. 괜찮아요.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는데요, 뭐. 그렇게 말하는 리쿠의 볼 역시 살짝 붉어져 있었다. 거짓말. 더워서 그런 거면서.
"많이 뛰었네요?"
"조금요."
"조금은 아닌 것 같은데?"
장난스럽게 뱉는 말에도 쉽사리 웃음이 안 나왔다. 미안함에 유우시가 리쿠를 힐끗 바라보며 입 안 살을 깨물자, 리쿠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여니 설탕 냄새가 풍겼다. 늦으면 설탕 과자 또 산다고 했던 게 진짜였네. 어안이 벙벙. 황당한 표정으로 리쿠를 바라보니 리쿠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런다. 산다고 했잖아요. 지각쟁이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지각했으니까, 이거 유우시가 다 먹어요.
"이걸 전부 먹어요?"
"뛰었으니까 당 충전 겸."
"리쿠도 방금 뛰어온 것 같은데."
"저는 괜찮아요."
"아니에요, 리쿠도 좀 먹어요."
머뭇거리며 설탕 과자 하나를 꺼내 입에 넣은 유우시가, 곧바로 다른 하나를 리쿠 쪽으로 내밀었다. 살짝 놀란 눈으로 보던 리쿠가 이내 못 이기는 척 받아 물었다. 엑, 으엑. 설탕보다 단맛에 동시에 표정을 찡그렸다. 큭, 풉. 결국 웃음이 터졌다. 리쿠랑 있으면 왜 이렇게 단순해지는 건지. 조급해지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눈앞에 리쿠를 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쨍, 웃음소리 사이로 맑은 소리가 한 번 울렸다. 흠칫, 내려다본 유리병에는 각설탕 하나가 구르고 있었다. 이거 봐, 또 늘었다. 유리병을 끌어안은 유우시가 리쿠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진짜 유리병이 선호하는 사람도 있나."
분명 작게 중얼거린 건데. 유우시의 말을 들은 건지 살짝 멈췄던 웃음이 또 한 번 터진 리쿠였다. 입가를 가린 리쿠가 유리병을 콕콕 치면서 말했다. 그런가 봐요, 보는 눈 있다. 그리고는 또 쨍. 유리병을 확인한 유우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늘었는데, 이상하네. 그런 유우시를 바라보던 리쿠가 살짝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가 볼까요. 여기 근처에도 빵집이 세 개 정도 있더라고요. 세 개나? 네, 세 개나. 살짝 고개를 끄덕인 유우시가 리쿠의 옆에 섰다. 어디 먼저 가면 돼요? 음. 짧게 고민하는 소리를 낸 리쿠가 유우시를 돌아봤다.
"유우시가 가고 싶은 곳부터요."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최고의 빵집. (^_^)'
중앙 광장에서 벗어나 골목 모퉁이를 두 번쯤 꺾자 작은 빵집 하나가 나왔다. 맵 기준 두 번째로 평이 좋은 가게였다. 영업 중이라는 문구에 찾아온 건데, 왜인지 불안하게 문 앞 테이블 위로 의자가 올려져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조금 더 다가가니 사람은 커녕 불이 꺼진 가게만 리쿠와 유우시를 반기고 있었다. 케이크랑 빵은 있는데, 왜 사람이. 두리번거리던 리쿠가 유리문에 붙은 종이를 읽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우시, 저희 조금 늦었나 봐요.
"왜요?"
"끝났네요."
"벌써요?"
"네, 방금 막 영업 종료."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소년과의 만남에 야속하게 흐른 시간은 유우시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유우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리쿠랑 있을 땐 늘 일이 잘 풀리던데. 아까 그렇게 오래 있지 말걸. 유리병 가게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볼을 살짝 긁은 유우시가 머뭇거리다, 리쿠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괜찮다고는 했는데 내가 안 괜찮네. 오늘 일은 전부 제 불찰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도, 소년을 만나 리쿠를 잊은 것도, 리쿠를 기다리게 한 것도. 리쿠 너머의 나무를 바라보며 유우시가 입을 뗐다.
있죠, 미안해요. 사실은 오늘 유리병 가게를 우연히 가게 됐는데. 소년과의 재회를 꺼낸 유우시가 리쿠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의뢰 종료, 유우시가 뱉은 말 하나에 리쿠 역시 말을 잃었다. 그러면 이 장소를 찾으면 우리도 못 만나게 되는 거네요. 리쿠가 아쉽다는 듯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리쿠의 웃음을 바라보니 왜인지 모르게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마지막 장소를 찾으면 리쿠와도 마지막이 되는 거구나. 놓치고 있던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까지 미안하던 마음이, 지금은 왜 이렇게 다행처럼 느껴지는 건지.
유우시의 유리병 안으로 각설탕이 하나 떨어졌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늘어난 각설탕을 본 유우시가 리쿠를 바라봤다. 각설탕과 리쿠, 리쿠와 각설탕. 리쿠와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아쉬웠다. 아쉬운 이유는, 글쎄. 리쿠 없이 다닐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번갈아서 보던 유우시가 리쿠에게 말했다. 저한테 의뢰 종료라고 했지, 리쿠의 의뢰는 종료되지 않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의뢰가 끝났어도 우리는 만나면 안 될까요? 리쿠가 놀란 눈으로 유우시를 바라봤다. 계속요? 네. 왜요?
"네?"
"왜 우리가 만나길 원해요?"
"그러니까..."
"네."
"리쿠랑 있으면 이상하게 편하고, 또 시간도 빨리 가고..."
잠깐의 정적. 리쿠의 시선이 제게 닿은 걸 눈치챈 유우시가 고개를 숙여 타일을 바라봤다. 리쿠가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올렸다. 그래요? 음.
"... 저도요."
"네?"
"저도 유우시랑 있으면 즐거워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고."
"아,"
"그러니까 좋아요. 우리 계속 만나요."
유우시의 유리병에 각설탕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귀가 뜨거운 느낌에 손으로 살짝 가린 유우시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아직 두 군데 남았으니까 가 봐요. Padaria São Miguel, Pastelaria Bela Vista 화면 안에 적힌 글자가 반짝였다. 리쿠가 장소 하나를 눌러 길을 확인했다. 다시 가 볼까요. 리쿠의 발걸음을 따라 유우시가 뒤따라가기 시작한다. 의뢰가 끝나도 리쿠와 만날 수 있다. 그 사실 하나가 토쿠노 유우시의 기분을 금세 좋아지게 만들었다. 좋아해도 되는 거겠지.
리쿠와 함께 하면 즐거운 것도 사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것 사실, 마키보다 리쿠가 더 자주 떠오르는가에는 동그라미. 그래, 유우시도 알 것도 같았다.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데... 이게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라는 것. 한 가지 걸리는 건 사토 마키. 끝난 게, 그러니까 맞기는 한데. 내가 지금 이렇게 넘어가도 되는 건가,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리쿠를 만나는 건 정말 괜찮은 걸까. 마구잡이로 늘어나는 생각들이 겹쳐질수록 이상하게 답은 또렷해지지 않았다.
잊혀지고, 잊어버리고, 잃고, 다시는 못 보고. 마지막 장소를 찾으면 우리도 마지막이네요. 그 말이 뭐라고 심장을 철렁이게 만드는 건지. 앞서 걸어가는 리쿠의 뒷모습을 본 유우시가 심장 위로 두 손을 포개 올렸다. 쿵쾅쿵쾅.
"있죠,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궁금한 게 또 있어요?"
"어땠어요?"
"뭐가요?"
"좋아하게 되면."
리쿠가 살짝 웃었다. 어쩐지 캐묻는 것 같은 느낌에 머쓱해진 유우시가 급하게 덧붙였다. 이것도 별 뜻은 없어요. 리쿠 불편하면 얘기 안 해 줘도 되고요. 그러자 리쿠가 음, 소리를 내고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주는 쪽이 익숙해요."
바람 소리 사이로 말끝이 흩어졌다. 힐끗 바라본 리쿠의 얼굴은 처음으로 살짝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주는 쪽이요?"
"네. 먼저 연락하고, 보고 싶어하고, 맞춰 주고 그런 거."
잠깐 생긴 공백에 살짝 웃음을 보인 리쿠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했어요. 유우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소년의 말이 떠오를 건 뭔지. 가득 찬 사람은 덜어낼 줄 모르고, 비어 가는 사람은 비어 가는 줄도 모른다고. 왜인지 소년이 리쿠와 저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리쿠만 바라보자, 리쿠는 아무렇지 않은지 담담하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많이 준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그냥 좋아하니까 하는 건데, 상대는 그게 아니었나 봐요."
"..."
"그래서 한동안은 제가 이상한 줄 알았어요. 이 방식이 잘못됐나 하고."
큭큭. 어울리지도 않게 웃은 리쿠가 유우시를 바라봤다. 이게 다예요, 별것 없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말과 달리 흔들리는 눈을 본 유우시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응?"
"리쿠가 이상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리쿠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그냥... 사람마다 깊이가 다르잖아요."
"깊이요?"
"네. 유리병으로 치면 컵에 담길 만큼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병이 가득 차게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런 거요."
깊이가 꽤 있어 보이는 리쿠의 유리병. 유우시가 살짝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유리병처럼 리쿠 마음은 깊은 거라고 생각해요. 이상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리쿠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유우시의 말을 끝으로 리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럴게요. 애꿎은 귀를 만지작만지작. 유우시를 힐끔 바라보던 리쿠의 유리병에서 쨍, 맑은소리가 울린다.
Padaria São Miguel 두 번째로 찾아간 빵집 역시, 실패였다. 가게 내부 수리 중이라는 짧은 안내와 함께 내려가 있는 셔터에 작게 실소가 터졌다. 어떻게 둘 다 이러지. 리쿠 역시 예상하지 못한 건지 멍한 표정으로 가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면 어떻게 하지. 리쿠에게 살짝 다가간 유우시가 조금 눅눅해진 설탕 과자 하나를 내밀었다. 조금 눅눅하기는 한데, 아까보다는 덜 달아요. 리쿠가 살짝 끄덕이고는 가만히 있자 유우시가 슬쩍 리쿠의 입 앞까지 과자를 가져다 댔다. 최고의 빵집은 내일 찾아볼까요. 시간도 많이 늦어서 다음 가게도 문 닫았을 것 같은데.
얼떨결에 과자를 입에 문 리쿠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네, 라며 웅얼거렸다. 진짜 덜 달죠. 리쿠 모습을 본 유우시가 킥킥, 웃었다. 귀여워. 에, 귀여워? 방금 이게 무슨. 쨍, 쨍, 쨍. 각설탕이 요란하게 유우시 유리병으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리쿠가 귀여워. 응, 귀여워.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최고의 빵집? ^_^'
6월. 리스본의 축제 기간이었다. 형형색색 종이로 꾸며진 조명과 가게 앞에 놓여진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인지 평소보다 복잡한 거리 풍경을 본 유우시가 살짝 창문을 닫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소년과의 만남으로 리쿠를 기다리게 한 날, 결국 세 번째로 가야 할 장소를 못 찾은 채 헤어진 지도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답 찾으면 읽어보라고 했었는데. 탁자 위에 놓여진 작은 종이를 본 유우시가 고민했다. 여전히 답을 내리기에는 확신도, 떠오르는 것도 없지만 읽어봐도 될 것 같은데.
소년이 저를 보며 큭큭 웃던 얼굴이 생각났다. 왜인지 얄미운 얼굴에 절로 입술이 삐죽거린다. 그냥 읽어보지, 뭐. 종이 안에 그 어떤 내용이 적혀 있어도 절대 울지 말고 화내지 말 것. 접힌 종이 아래 자그만 글씨가 있었다. 참나. 내가 무슨 애야? 다시 한번 삐죽. 살짝 의자에 걸터앉은 유우시가 턱을 괴고는 종이를 들어 이리저리 확인했다.
유우시에게.
접힌 종이를 살짝 펼쳐 틈으로 확인하니 평범한 편지인 듯했다. 아, 뭐야. 살짝 긴장했던 것과 달리 평범한 시작 문구에 유우시가 종이를 전부 펼쳤다.
ㅡ
유우시에게.
잘 지내고 있지? 어떤 말로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몇 번이고 쓰고 지운 건데 결국 이렇게 남겨.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는 건 괜찮아졌다는 거겠지. 다행이야.
나는 가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무섭다는 생각을 했어. 좋아할수록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지는 순간이 있었거든. 그 사람이 원하는 나를 먼저 상상하게 됐고, 또 그 상상 속 나를 실제 나라고 착각하며 지냈던 것 같아. 처음에는 그게 사랑일 거라 믿어서 괜찮았는데, 그게 점점 나를 조금씩 지우더라.
너에게 맞춰진 내가 나를 잃어가게 만든 걸 깨달았을 때, 도망친 거야. 내가 그 상태를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 설명하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해. 내 스스로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이기적인 선택을 했어. 그게 너에게 상처가 됐다는 것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해.
유우시,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너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염치없지만, 언젠가 내가 생각나더라도 지금의 너를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계속 너였으면 좋겠고.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네가 어떤 식으로든 괜찮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가끔 해. 이만 말 줄일게. 안녕, 유우시.
마키.
ㅡ
안녕, 유우시. 마키의 이름에서 시선이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그러니까 마키와의 이별 이유가 전부, 전부. 짧게 한숨을 내쉰 유우시가 종이를 접었다. 킁. 빨개진 눈가를 아무렇게나 닦은 유우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었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유우시가 접은 종이를 작게 찢었다. 가장 알고 싶었던 거 하나, 이제 알았으니까 됐지, 뭐. 그렇게 알고 싶어했는데 막상 알게 되니 허무했다. 빨개진 눈가를 다시 문지르며 유리병을 확인하니, 처음 받았을 때보다 각설탕 양이 늘어나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다. 내내 각설탕이 떨어지는 소리는 나도 이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늘어난 적은 없는데. 유리병을 가만히 들여다본 유우시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이내 나갈 채비를 했다. 새로운 각설탕들로 차기 시작한 유리병. 그리고 소년의 말.
이 유리병은 유우시 군의 것이에요.
비어 가는 사람은 비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아주 만약에, 기존에 있던 각설탕이 정말 만약 마키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남아있던 각설탕이 좋아하는 마음이 아닌 헤어진 진짜 이유였다면 이렇게 전부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리쿠와의 만남에서 자꾸만 각설탕이 늘던 것도, 맑은소리가 들렸던 이유도 생각하는 게 맞다면. 차곡차곡 맞춰지는 퍼즐처럼 유우시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마키와의 이별 이유, 사라진 각설탕, 채워진 유리병. 모든 생각이 단 한 명을 말하고 있었다. 마에다 리쿠. 쨍, 울리던 각설탕과 리쿠.
[리쿠.]
[어디예요?]
또... 마지막 메시지 전송을 앞두고 잠깐 멈칫하는 유우시다. 너무 갑작스러운가. 리쿠가 이 연락 보고 당황스러워하려나. 각설탕이 유리병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쨍, 쨍, 쨍. 호흡이 급해졌다. 유리병을 품에 꽉 껴안은 유우시가 눈을 질끈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저 지금 리쿠를]
[보러 가고 싶어요.]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XXXXXX?'
[축제라고 해서 잠깐 밖에 나왔어요.]
[유우시는 어디예요?]
축제는 축제였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메시지를 확인한 유우시가, 골목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밀렸다. 벽에 붙어 위태롭게 서 있던 유우시가 휴대폰을 들어 음성 메시지를 전송했다. 저 지금 리쿠가 사 줬던 설탕 과자 근처예요. 곧바로 도착한 메시지에는 리쿠의 위치가 보이는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을 유심히 확인해 본 유우시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리쿠가 있는 곳으로 가 봐야겠다. 알아낸 게 있어요. 아니, 깨달은 게 있어요. 리쿠를 만나, 목 끝까지 차오른 이 말을 전해야 할 것만 같았다.
리쿠 의뢰가 완료돼도 같이 있고 싶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리쿠가 좋은 것 같아요. 궁금해요, 신경 쓰여요, 만나고 싶어요. 보고 싶기도 하고요. 뒤죽박죽 머리를 헤집는 말들이 유우시의 걸음을 자꾸만 빨라지게 했다. 리쿠가 보낸 사진의 장소에 가까워졌을 때쯤, 트램이 철도를 긁으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기타 연주 소리, 파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또 울리는 맑은소리. 쨍, 소리와 함께 각설탕이 떨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우시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찾았다. 맞은 편에 서 있는 남자. 유우시의 유리병과 달리 깊은 유리병. 검은 생머리. 더운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토쿠노 유우시가 한참을 찾던 사람.
"리쿠!"
시끄러운 주변 덕분인지 큰 소리를 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리쿠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유우시가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빵ㅡ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28번 트램이 경적음을 울렸다. 리쿠랑 처음 만났을 때 같다. 조급했던 마음에 웃음이 살짝 퍼졌다. 익숙한 상황에 해맑게 웃는 유우시를 바라본 리쿠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가득했다. 같은 생각이라도 하나 봐. 트램이 속도를 점점 줄이더니 이내 유우시의 앞을 지나쳤다. 긴 트램을 뒤로, 리쿠가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리쿠, 리쿠, 리쿠.
쿵쾅쿵쾅. 달려와서 그런 건지 리쿠를 만나서 그러는 건지. 저절로 급해지는 기분에 호흡을 가다듬은 유우시가 리쿠를 빤히 바라봤다. 쨍. 이것 봐, 이렇게 쉽게. 도대체 리쿠는 뭐길래, 이 좁은 입구도 문제없다는 듯이 각설탕을 쉽게 넣지. 유리병을 시선을 돌렸던 유우시가 고개를 들었다. 진짜 유리병 보는 눈 있나 보다. 그러니까, 여태 리쿠한테 못한 말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요. 호기롭게 리쿠에게 말을 꺼낸 것치고는 머뭇거리던 유우시가 입을 겨우 뗐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쨍.
"하나 알아낸 게 있거든요,"
"네."
"가득 찬 거랑, 비어있는 거요."
"..."
"리쿠는 계속 준다고 그랬는데... 이거, 이렇게."
각설탕이 차곡차곡 쌓이기도 해요. 아직 낮게 쌓아지기는 했지만요, 그래도. 리쿠 유리병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거예요. 아, 그러니까, 제가 직접 넣은 것 말고도... 리쿠 유리병에 혹시 저로 인해서 각설탕이 들어가게 됐으면요. 횡설수설 이야기하는 유우시를 바라보던 리쿠가 살짝 웃었다. 킥킥. 네, 이건 유우시 유리병에 쌓인 각설탕이에요? 그러면서 리쿠가 자신의 유리병을 유우시 앞으로 내밀었다. 다른 모양의 두 유리병에 각설탕이 쌓여있는 게 보였다. 쨍. 리쿠의 유리병을 확인한 유우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깊은 유리병 안에도 각설탕이 낮게 쌓여있었다. 어, 그러면.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둘 다 새빨갛게 물든다. 저기, 빵집 하나 열려 있던데. 리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 볼까요. 네, 가 봐요. 웃으며 살짝 리쿠를 흘겨본 유우시가 대답했다. 쨍, 쨍. 유리병 아래로 각설탕이 떨어졌다. 리쿠의 속도에 맞춘 유우시가 걸음을 옮긴다. 유리병 안에서는 각설탕이 구른다. 데굴데굴, 손등이 닿았다. 가깝게 맞닿은 틈을 유지하던 손이 살짝 얽혔다. 풉. 자연스레 얽힌다, 얽힌 새끼손가락이 풀릴 생각도 없이 머문다.
"의뢰 종료여도 계속 만나요."
"그러기로 했잖아요."
"한 번 더 말해 봤어요."
"좋아요. 의뢰 종료여도 계속 만나요, 우리."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XXXXXX?'
각설탕 하나가 떨어진다.
Maeda&Tokuno
쨍, 쨍, 쨍.
마에다와 토쿠노.
^_^
'Miradouro de Santa Luzia, Thieves' Market Lisbon, Maeda&Tokuno'
안녕하세요. 의뢰인 마에다 리쿠 님, 의뢰가 완료되어 연락드립니다. 채워지지 않던? 유44리⍰병이 채워지길 원하셨죠. 다행입니다! 의뢰인과 매칭된 T군은 입구가 좁고 넓은 유리병이라, 각설탕이 쉽게 줄지도 늘지도 않.ㅉ?ㅂ으실 거예요. 유리병의 깊!#이로 XXX했던 문제 역시 이번 매칭된 분과는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역시 제 안목은 틀리는 날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부디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의뢰인 마에다 리쿠 님이 원하시는 게 이번에는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유리병을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아,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마에다 리쿠 님의 유리병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아주 예쁘고 귀한 유리병이었답니다. 이제는 의뢰와 유리병에 상관 쓰지 않으셔도 돼요. 온전히 마에다 리쿠 님과 토쿠노 유우시 님의 선택으로 이뤄질 것들입니다.
70번째 의뢰인, 마에다 리쿠 의뢰 완료.
의뢰 내용: X?dS@# 하게 해 주세요.
대상자 및 매칭자, 토쿠노 유우시.
유`'리#?병 이상 없음.
Diário de Bo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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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랑에게서 도망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런 와중에도 차곡차곡 쌓는 법을 배우고, 또 어떤 사람은 깊이감으로 생겨나는 문제에도 묵묵히 채우는 법을 알았어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유리병은, 꽤나 예민해서 쉽게 깨질 때도 있고, 햇빛에 빛날 때도 있고, 누군가를 비추게도 한답니다. 만약 이 글을 읽은 여러분 중에서도, 깨질 것 같은 유리병을 다시 복원하고 싶으시다면 아래 번호로 연락해 주세요. 이 이야기는 그냥 지나쳐도 되는 아주 작은 이야기일 뿐이에요. 저희 가게는 언제나 여러분의 행복을 바랍니다. 늘 행복하시길.
잘 가요, 바이바이. ^_^
번호 안 보이세요? 착한 사람한테만 보이는데.
헐.
유감입니다.
진짜 바이바이.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