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 미 이프 유 캔
sum
上
날개를 가지지 않은 것들은 하늘에 속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처음부터 지상에 태어났다. 인간이 그렇다. 태초부터 지상에 놓인 인간은 본디 선할까, 혹은 처절하게 악할까? 내가 생각할 때 인간은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다. 처음 어머니의 뱃속을 나와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아이는 백지와 같다. 그 백지 위에 무엇이 쓰이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세계 안으로 던져졌는가에 달려있다.
던져진다는 피동의 표현을 쓴 것은 나와 내가 사랑한 Y의 타락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의 타락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당신은 인간이라는 지상의 종족이 사랑을 위해 대체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나의 대답에 관한 이야기다.
1부: 타락천사(墮落天使)
一. 45200406
정리는 재떨이부터 시작한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꽁초 두 개. 그는 항상 담배를 필터까지 피우는 사람이었다. 꽁초를 집어 휴지통에 버리면서 늘 필터 직전까지 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한테도 괴상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가 남긴 꽁초를 꼭 입에 한 번 물어보고 버린다. 이것이 내가 Y와 입맞춤을 하는 방법이다.
셩완의 새벽은 늘 같은 냄새가 난다. 식당에서 나는 오래된 식용유 냄새, 그리고 빗물과 오래된 콘크리트가 뒤섞인 냄새. 삐걱대는 창문을 열면 아래쪽 골목에서는 노점상이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콩의 아침은 대체로 듣기 싫은 소리로 시작한다. 나는 그것이 익숙했다.
Y의 컵은 늘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반쯤 마시다가 둔 커피는 식은 지 오래였다. 나는 그것을 들어 싱크대에 남은 커피를 버리고 물로 헹군다. 100주가 넘는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해온 일을 할 때 머릿속은 고요하다. 이 일은 생각이 필요 없어 좋다. 생각을 비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행여나 생각 같은 게 일을 하다 머릿속으로 끼어드는 날에는 구역질이 올라오곤 한다.
침대 시트를 걷어냈다. 시트 위는 남아있는 체온이 거의 없었다. 그가 이 방을 나간 것은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아마 침대 위에 눕는 일도 없었을 수 있다. 그리고 체온이 남아있다고 해도, 그건 Y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오늘 밤 죽인 이름 모를 남자의 것일까.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체온을 찾으려 미지근한 시트에 볼을 부벼본다.
새로 깔아둔 지 얼마 되지 않아 까끌까끌한 면 직물의 질감이 건조한 볼에 스몄다. 아무 냄새도 남아있지 않았다. 피비린내 사이로 Y의 냄새를 찾다가 그만두는 것도 일상이다.
내게 남겨진 Y의 흔적이라는 건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재떨이의 꽁초, 책상 가장자리의 컵, 혈흔이 가득하고 구겨진 시트. 나는 그것들을 매번 치우는 일을 했다. 그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말끔히 없애버리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아무런 회의 없이 단순한 직업적인 절차처럼 행했다. 지금 내게 이 궂은일을 왜 남들 몰래 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이 행위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
욕실 거울에는 물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불투명한 김이 서린 거울 위로 물방울이 조금 맺혀있다는 건 Y가 일을 마친 후 샤워를 했다는 뜻이었다. 샤워를 하는 건 그의 루틴이었다. 나는 또 바보처럼 거울 위로 볼을 가져다 대도 멍하니 부빈다. 그가 다녀간 자리에서는 가끔 바지 안에 성기를 만지기도 한다. 볼에 닿는 차가운 거울과 다르게 손에 잡히는 나의 것은 뜨겁다. 그의 집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의 흔적을 남겨보기도 했다.
사정을 마치고 볼을 거울에서 떼면 볼이 닿았던 자리 위로만 내 얼굴이 선명히 비춰 보인다. 상기된 얼굴과 늘 잠을 제대로 못 자 퀭한 눈. 입매는 언제나 굳어있다. 보통 나의 얼굴은 이 모양이니 낯선 얼굴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법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다. 애써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거울을 닦은 후 수건을 개어 제자리에 두고 욕실을 나왔다.
창밖으로 셩완의 간판들이 희뿌연 새벽빛 속에 젖어 있었다. 한자와 영문이 뒤섞인 낡은 간판들. 네온이 꺼진 자리에 회색빛이 고여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처음 뜨는 해를 자주 이곳에서 보게 된다.
이 방의 주인인 Y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질문은 항상 그쯤에서 시작해서 바로 끝난다. 나는 Y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에 유일한 규칙 같은 거였다. 직접 만나지 않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를 듣는 일도 없다.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남진 흔적들 뿐이었다. 꽁초, 컵, 구겨진 침대 시트. 그리고 습한 욕실.
나는 창문을 닫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낡은 철문이 철컥하고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나는 텅 빈 복도에서 잠시나마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처음엔 계단을 내려갈 때, 마치 내가 좀도둑이나 강도가 된 것처럼 살금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지도 않는다.
건물을 나서서 바로 앞에 있는 노점상은 아침이 올 때마다 두부를 썰고 있었다. 도마를 뭉툭하게 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그를 지나쳤다. 도마에 고개를 처박은 아저씨는 내게 눈길 하나 안 준다. 나에게 홍콩은 이런 곳이다. 서로의 존재를 구태여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각자의 일을 마냥 성실히도 치른다.
당신이 방금 나를 스쳐 지나갔다고 해도 모를 나의 일은 킬러의 파트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2년 전이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자주 찾는 노포 식당에 유리 진열장 한켠은 수십 장의 쪽지가 붙어있었다. 만일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거나, 혹은 그와 그저 지나가는 사이였다면 손바닥만 한 노란 종이에 적힌 광둥어 한 줄을 보고 유우시의 글씨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려나. 진열장에 붙은 다정한 쪽지들 사이에서 내가 그의 쪽지를 발견하는 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招聘。做嘢好嘅人。請打呢個電話。
구인. 일 잘하는 사람. 연락은 이 번호로.
한 줄뿐인 쪽지에는 이름도 없었다. 구인한다면서 어떤 일인지조차 적혀있지 않은 불친절한 쪽지였으나 나는 그 쪽지를 본 순간 적히지 않은 이름을 볼 수 있었다. 한자 획이 끝날 때마다 힘을 빼는 버릇, 글자가 오른쪽으로 우상향하는 필체. 나는 그 글씨를 오래전부터 보았다. 삐뚠 글씨는 누군가 말하기로는 악필이었다. 그 쪽지를 떼어내지 않고 쪽지에 적힌 번호만 외웠다.
45200406.
식당을 나서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고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걸었다. 좁은 거리를 지날 때면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바로 옆에서는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골목 구석으로 사람들을 피하고 서서 핸드폰에 그 번호를 열두 번을 눌렀다가 지웠다. 열세 번째에는 통화 버튼을 겨우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전화기 너머로는 옅은 숨소리만 들렸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10초쯤 지나서야 전화를 받은 쪽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일 할 수 있어요?"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핸드폰을 쥔 손이 굳는 것을 느꼈다. 유우시다. 분명히 형이야.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어려서부터 주의 깊게 들었던 목소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네. 할 수 있어요."
이것이 나의 타락한 사랑의 시작이다. 혹은 죄 없는 내 사랑이 타락하기 시작한 걸까요?
二. 마에다 류이치로
"안녕."
"..."
"내 이름은 유우시야."
사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리쿠에게 형이 생겼다. 아버지의 양자라고 했다. 형이 아버지의 말을 잘 들을수록 리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적어졌다. 이름은 유우시. 어디서 일본인을 데려왔는지 아버지에게 리쿠는 묻지 않았다. 형은 보통의 날들에 말이 없었다. 리쿠가 기억하는 유우시는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말하면 들었고, 시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 시간에는 형의 방에 있는 낡은 책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형이 어느 날 키가 훌쩍 자랐을 때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우는 건? 형으로부터 표정이라는 걸 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는 듯했다.
아버지가 유우시를 서재로 부르는 날이 있었다. 리쿠는 그날들을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서재에 다녀온 유우시는 저녁밥을 함께 먹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있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식탁 위로 침묵만 고였다. 한 번은 욕실에서 형의 셔츠를 보았다. 아주머니가 세탁기에 넣기 전에 피가 묻은 흰색 셔츠가 잠깐 보였다. 리쿠는 본인이 입고 있는 교복의 빳빳한 깃을 어색하게 만졌다. 형은 교복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형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사라진 유우시를 찾지 않았다. 리쿠는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아버지한테 과연 형은 어떤 존재였을까. 아꼈던 것일까 혹은 소유했던 것일까? 그 두 개의 단어가 아버지한테는 같은 말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리쿠는 유우시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이 형을 꽤 오래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용한 등과 초점 없는 눈, 숟가락을 들지 않는 저녁.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오래도록 보고 자랐다. 그리고 형이 없는 집이 쓸쓸해졌다. 쓸쓸한 형의 방에 혼자 들어가 본 날 갑자기 울음이 터졌을 때 형의 행동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상실. 그리고 형이 떠난 자리에 남은 상실은 리쿠에게로 왔다.
마카오로 가는 페리는 한 시간이 걸린다. 리쿠는 페리에 타고 그 시간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탁한 빛의 수면과 파도도 없이 평평한 바다. 그 너머로 홍콩이 멀어지고 마카오가 가까워지는 동안 리쿠는 내려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지 되새겼다. 대할 때 표정과 눈빛이 불필요해지는 타인이 있다. 그를 대할 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을 하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익혀온 기술이었다. 그 사람의 세계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세나도 광장 근처의 건물은 외벽이 낡아 군데군데 회벽이 벗겨져 있었다. 파스텔 빛이었을 하늘색의 건물 벽면은 노인의 피부처럼 얼룩덜룩했다. 리쿠는 이 건물을 볼 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반드시 추하게 낡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올라 3층으로 향했다. 맨 끝에 있는 방에 가야 한다.
노크하지 않고 들어간 방 안 창가에는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저택을 놔두고 왜 굳이 이렇게 낡은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살까. 아버지는 늘 창가에 앉아 광장을 내려다보는 것을 즐겼다. 오래된 가죽 의자와 나무 테이블, 그리고 식지 말아야 할 따뜻한 차를 올려둔다. 차는 항상 딱 한 잔이다. 방문객을 위해 차를 내어주는 친절 같은 건 리쿠의 아버지가 가진 수많은 것들에 속하지 않는다.
"왔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이 건물의 외벽과 비슷한 목소리를 가졌다. 아버지가 왔느냐고 하는 말은 그를 반긴다는 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안부를 묻는 말도 아니었다. 일종의 확인 같은 거였다. 내가 불렀으니, 네가 여기에 와있구나. 그런 것.
"네."
리쿠는 짧게 답했다. 아버지로부터 앉으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꼭 문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창밖의 광장을 내려다보는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밑에서 사람들이 포르투갈풍 타일 바닥 위를 웃으며 오가는 모습들이 리쿠에게도 보였다. 낡은 건물의 창으로 보이는 것들은 알록달록한 우산,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카메라 플래시들이었다. 아래의 세계는 3층보다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홍콩 쪽 루트 정리됐나."
"다음 주 안에 마무리됩니다."
"사람은?"
"문제없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리쿠를 보았다. 오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은 타인을 가늠하고자 하는 눈 같았다. 리쿠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자 하면 품고 있는 생각이나 욕망 같은 게 읽히지 않게 된다.
"너도 이제 슬슬 자리를 잡아야지.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할 게 뭐 있어."
"..."
"네가 어디서 자랐는지 잊었냐. 내가 뭘 해줬는지 그래서 너는 무엇을 위해 자랐는지."
리쿠는 대답하지 않았다. 뜨는 대화 사이로 창밖의 광장에서 어린아이가 웃는 소리가 올라왔다. 높고 맑은소리가 방 안에서 이질적으로 울렸다.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의 말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위해 자라왔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로 입술을 축였다.
리쿠는 허리를 한 번 숙여 인사하고 그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주머니 안에 손을 꽂는 것은 손이 떨리는 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실이라는 말을 선악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리쿠의 아버지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사람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일본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고 했다. 사람을 헤치고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피 묻은 자부심을 리쿠에게 전할 때 리쿠는 어느 순간부터 몰래 비소를 띠었다.
三. 마에다 유우시
그 남자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밤 열한 시의 몽콕은 여전히 사람이 가득했다. 가로등 하나 없어도 간판 불빛만으로도 거리가 환했다.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도 거리를 채웠다. 그 안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유우시만이 맞은편 건물 이 층 창가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세 번째 맥주였다. 남자는 술이 세지 않았다. 두 캔째부터는 귀가 빨개졌다. 세 번째 캔을 열 때는 손이 약간 느려졌다. 유우시는 그것을 확인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아니 그 전에 조직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무언가를 할 때 생각이라는 건 꽤나 과분한 행위였다. 생각이 많아지면 괜히 손만 늦어진다. 손이 둔해지면 일을 그르치게 되니 생각하지 않는 것은 킬러에게 단순한 이치였다.
건물 앞에 있는 골목은 좁았으며 블록마다 있는 배수구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머리 위로 빽빽하게 걸린 빨랫줄에는 누군가의 옷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유우시가 그 골목을 지나 편의점까지 도착하는 데는 3분이 걸렸다.
남자가 네 번째 캔을 열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는 유우시가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담배 하나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남자의 눈이 흐렸다. 담배를 받아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았다. 그 이후의 일은 길지 않다. 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사라질 때 몽콕의 불빛은 여전히 넘치고 오토바이는 골목을 가르며 지나갔다. 편의점 직원은 잡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남자 둘이서 이곳에서 발버둥을 친대도 세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를 차에 태워 유우시의 세계 안을 가둬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훨씬 더 쉬운 일이 된다. 그게 유우시가 꼭 일을 셩완의 집 안에서 치르는 이유였다.
더 이상 날숨이 없는 남자가 누운 자리의 옆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재킷을 벗어 행거에 걸려두고 다른 옷을 걸치며 문을 열었다. 전화기를 꺼내 메시지를 입력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끝났어. 정리해.
메시지를 보내면 파트너가 그것을 읽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분. 그쪽에서도 항상 유우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본 창밖으로 야경이 번쩍였다. 수백 개의 창문, 그 안에는 수백 개의 불빛. 그 아래에는 각각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위에는 늘 전등 하나 없다.
기억은 항상 냄새로 시작됐다. 지폐가 뭉친 곳에는 오래된 기름과 같은 썩은 냄새가 난다. 공간의 상당 부분을 그런 지폐들이 차지하고 있는 곳은 두려움과 복종의 냄새도 난다. 유우시는 자신의 코가 그 냄새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불현듯 깨닫고는 했다. 오늘 밤도 그런 밤이었다. 구룡의 숙소는 좁았다. 싱글 침대 하나에 창문 하나. 팔을 뻗으면 욕실 문이 닿을 듯하다. 유우시는 그런 방이 좋았다. 넓은 방에서는 제대로 된 잠을 자본 기억이 없었다. 공간이 너무 넓으면 쓸모없는 생각이 스미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기억,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쾌한 오만가지의 무언가.
가끔은 좁은 방도 그런 것들을 막기에 속수무책인 날들이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누운 채로 유우시는 원하지 않은 장면들을 떠올렸다. 기억이란 늘 예의가 없어서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제멋대로 들어오는 일이 빈번하다. 마카오였다. 십 년 전. 세나도 광장 근처의 낙운이라는 이름의 낡은 건물. 삼 층 맨 끝 방. 유우시가 겨우 열여덟이었던 해의 일이다. 아직 아무것도 굳어있지 않았고 거절할 언어도 무언가를 요구할 배짱도 없던 말랑한 나이에 그 방에서 시키는 일들을 했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이 있었고 반대로 완전히 지워진 것처럼 망각한 기억의 구간들이 있었다. 지워진 구간이 무엇인가는 유우시도 어렴풋이 알 듯했고 그래서 애써 더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늘 복도에서 스치던 아이의 얼굴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열 살이었던가. 처음 그 방에서 나왔을 때 복도 끝에서 유우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던가 아니면 곧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이었나. 유우시는 그 어린 얼굴을 보고 앞에 섰다. 안녕. 내 이름은 유우시야. 그게 그 아이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다. 마에다 리쿠. 지워진 페이지에서 이름이 떠올랐다. 같은 세계 안에서 자라는 작은 아이를 유우시는 몇 번이고 안쓰러워했다. 자신처럼 공허한 눈을 한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유우시는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파트너로부터 답장이 와있었다.
처리했어요.
새로 구한 파트너는 단순했다. 필요한 말만 전하고 그 이상은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유우시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잠깐 생각했다. 파트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나의 메시지를 확인했을까. 그리고 나의 연락을 받을 때, 또 나의 방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 자리를 깨끗하게 치울 때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유우시는 당연히 그 얼굴을 알지 못했고, 알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어째서인지 그 생각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창문을 열었다. 유우시는 창틀에 상체를 걸쳐두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또 담배는 필터까지 피웠다. 짜리몽땅한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창문을 다시 닫았다. 오지 않는 잠을 노력해야 했다. 내일도 그래야 할 것이다. 모레도, 다음 날도.
유우시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마에다 류이치로를 생각했다. 굳이 본인의 비극에 남 탓을 해보자면 그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양아버지인 마에다 류이치로는 유우시를 무척 아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래도 적어도 양아버지는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거리에서 주워 온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가르친 그것은 그에게는 대단한 선의였다. 조직 안에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웠다. 그에게는 그것이 아낀다는 것의 의미였고 유우시는 오랫동안 그 논리를 이해하고자 했다.
양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홍콩의 작은 골목, 어떤 새벽이었다. 쓰레기 냄새와 빗물 냄새가 섞여 나는 그 골목에서 양아버지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에게 따뜻한 죽을 먹이고 따뜻한 곳에서 재웠다. 그게 전부였다면 유우시도 그의 행동을 선의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적어도 홍콩에서는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유우시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아챘을 때는 이미 한참이 흐른 뒤였다.
류이치로는 유우시에게 선이란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게 했다. 유우시는 오랫동안 그렇게 그 세계 안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이 원래 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신경을 찌르는 잔인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금세 무뎌졌다. 그걸 흐리게 만드는 것은 유우시의 생각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는 원래 선(善)이 없는 사람이다.
조직을 나올 때 싸움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로부터 사라졌다. 도망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 뒤로 양아버지, 류이치로는 나를 찾으려 했을까? 유우시는 홍콩을 떠나 다른 도시들을 전전했고 지금 하는 일을 시작했다. 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선택했을까. 유우시는 그것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양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사람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하기 싫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첫날 밤에는 오래 걸었다. 센트럴을 지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앞까지 걸었다. 에스컬레이터는 밤 열 시가 지나면 멈춘다. 움직이지 않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려다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홍콩의 밤공기는 습하다. 끈적이는 팔뚝, 머리 위로 지나는 오토바이의 소리, 골목에서 나는 냄새. 유우시는 입 밖으로 텁텁한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홍콩을 느꼈다.
나의 타락에도 바닥이 있을까. 나를 이곳에 떨어뜨린 존재에게 묻고 싶었다.
下
나는 태어난 날을 모른다. 나도 어머니의 뱃속을 나왔을 때 목이 터져라 울어봤을까. 그럼, 그 울음소리를 처음 들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나를 어떤 얼굴로 내려다봤을까. 혹시 나를 잠시라도 안아 준 사람이 있었을까.
홍콩의 어떤 골목에서 주웠다. 그것이 내 기억에 남은 내 인생의 시작이다. 그 사람이 내게 따뜻한 밥과 침대를 줬다. 나는 그것을 고마워했다. 감사함을 배우고 나서 한참 뒤에 증오를 배웠다. 누군가는 인간이 백지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백지는 내가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은 것들로만 채워져서 엉망이다.
이것은 엉망인, 짧은 내 인생에 관한 회고다.
러브 미 이프 유 캔
2부: 해피투게더 (春光乍洩)
四. 파트너 K
유우시는 이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할지, 그 전에 이 일을 어떻게 끝내게 될지 생각하지 않은 것이 오래됐다. 다른 세계를 감히 상상하는 것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치를 부리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새벽 구룡의 방 안에서 마지막을 결심하게 됐다. 류이치로가 시키는 일이 역해지기 시작할 때, 그래서 그로부터 도망칠 때부터 머릿속 어딘가에 타고 있던 작은 불씨가 있었다.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끝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숙소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종이를 꺼냈다. 짧은 메모를 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게 쓸 수 있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일이 끝난 후 자신이 살아있을지 혹은 죽어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따지자면 살아있지 못한 쪽으로 저울이 기운 듯했다. 그렇다면 남겨두어야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유우시는 펜을 잡고 잠깐 고민을 해봤다.
多謝你一路陪住我。
함께해줘서 고마웠다.
파트너에게 말을 남기기로 했다. 유서 같은 건 써보려 해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파트너에게 남기는 한마디가 인생의 엔딩 크레딧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다. 더 이상 쓰지 않고 펜의 뚜껑을 닫았다. 두 줄 이상의 말을 쓰면 과한 작별 인사가 될 것 같았다. 쪽지를 접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파트너는 워낙 꼼꼼한 성격을 가졌으므로 내가 만약 이곳에 말없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유우시는 마카오로 향하는 배에 탔다.
파트너에게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문자로만 이야기를 나눴다. 끝났어, 정리해. 그러면 네 처리했어요. 지난 2년간 문자 말고는 파트너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식당에 적어둔 쪽지를 보고 처음 파트너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이후로는 오랜만에 하는 전화였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아무런 말이 없고 전화 너머로는 숨소리만 들렸다.
"네."
오랜 시간 답을 하지 않은 것치고는 물음표도 없는 목소리였다. 놀란 것도 아니고 긴장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 대답에 유우시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이번에는 좀 달라서 전화했어."
"..."
"마카오에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아."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유우시는 파트너가 뭔가를 계산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에 동조하며 돈을 버는 인물은 단순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마카오에서 묵는 작은 방 안에서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내려쳤다.
"장소가 어디예요."
"세나도 광장 근처."
이번에는 침묵이 좀 더 길었다. 유우시는 전화기를 어깨로 받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고 끝부분만 잘근거리며 씹었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겠어요."
깔끔한 파트너는 더 이상 되묻지 않았다. 유우시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뱉은 입안에는 쓴맛이 돌았다. 세나도 광장, 낙운. 파트너에게 장소를 문자로 보내주었다. 류이치로는 자기 집보다 그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유우시는 알았다.
전화가 끊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Y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한참을 그 주소를 들여다봤다.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리쿠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Y는, 그러니까 유우시 형은 언제나 자신의 집에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셩완이 아닌 곳에서 일을 처리해달라며 보내온 주소는 리쿠도 아는 곳이었다.
소파에 앉아 형이 아버지와 있던 날들을 떠올렸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리쿠는 유우시의 타깃이 누구인지 알았다. 타깃은 마에다 류이치로, 아버지다. 그의 타깃은 나의 아버지다. 우리의 아버지라고 해야 할까. 리쿠는 주먹 쥔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형이 멈추게 해야 할까.
반나절이 지난 후 리쿠는 다시 Y에게 연락했다. 타깃이 된 자기 아버지의 동선, 경호 인원의 교대 시간, 그 방의 구조를 전부 넘겼다. 어쩌면 그 방에 리쿠보다 더 많이 들어갔을 유우시에게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마치 전날 밤새 준비한 것처럼 넘겼다. 그리고 다 됐다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보냈다.
문자를 보내고 나면 보통 곧바로 유우시의 방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Y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야 한다는 말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난 아버지의 방에서 늦은 밤의 세나도 광장을 내려다보며 유우시를 기다렸다. 광장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유우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다시 이 방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형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형이 Y의 모습을 하고 골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우시는 골목을 걸으면서 입에 짧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저 담배를 다 태우고 꽁초를 남기면 그것을 입에 물고는 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기괴하고 천박한 행동일까.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니 되려 패륜에 가까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리쿠의 패륜이 방문 앞에 섰다. 유우시는 그 방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재킷 안쪽으로 손을 옮겼다. 손가락에 닿는 차가운 피스톨이 철컥거렸다. 유우시가 방으로 들어와서 짧은 사이에 그 행동을 하는 사이에 마주한 리쿠는 가만히 멈춰있었다. 도망치려 하거나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상대를 향해 유우시가 다가갔다.
늦은 밤에는 광장의 불빛이 거의 없어 방 안은 무척 어두웠다. 유우시는 눈을 살짝 좁히며 앞에 선 상대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형이 나를 기억할까, 리쿠는 유우시가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유우시가 재킷에 넣은 손을 빼지 않으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움직이지 않는 상대 앞 두 발짝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그의 눈을 봤다. 얼마 전 구룡의 작은 방에서 떠올렸던 아이의 얼굴이다. 그때 어렴풋이 떠올린 얼굴보다 조금 더 자란 얼굴이었다. 마에다 리쿠.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 언제인지, 몇 살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훨씬 작은 키였던 듯한 리쿠는 유우시를 조금 넘길 만큼 커져 있었다.
재킷 안에 넣어둔 총을 꺼내 리쿠의 이마에 겨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제법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의뢰나 명령을 받아 일을 행할 뿐 아는 이를 죽여본 경험은 전무하다. 그러니 리쿠를 향해 단번에 방아쇠를 겨눌 용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총을 두 손으로 꽉 쥔 건 행여나 그가 자신을 막을까 봐 행해본 객기에 가까웠다.
"잠깐."
"..."
"안녕. 형."
리쿠는 이마에 바짝 다가온 총구에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두 팔을 어깨 위로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방 안으로 들어찬 어둠이나 유우시의 행동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밝은 얼굴을 했다. 유우시는 그제야 이마에서 총을 멀리했다. 이후로 둘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골목 아래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천천히 들렸다. 광장 근처에서 누가 틀어둔 줄 모를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짧은 인사를 건넸을 때 유우시의 눈이 달라지는 것을 리쿠도 보았다. 유우시가 나를 기억한다. 그 눈빛에서 읽힌 유우시의 생각이 내심 반가웠다. 리쿠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한 번 더 밝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형."
"..."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참."
"어떻게 알고 왔어."
리쿠가 한 팔을 내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유우시에게 받았던 문자들을 그를 향해 보여줬다. 유우시는 그제야 지난 2년간 자신과 함께한 파트너가 마에다 리쿠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던 유우시는 다시 총을 그의 이마에 가까이 두었다. 파트너가 깔끔하고 계산적인 것이 마음에 들다가도 가끔은 대체 이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이길래 나를 위한 일을 이렇게 철저하게 해낼지 의심한 순간들도 있었다. 파트너가 마에다라는 전제가 채워질 때 그것은 비로소 설명하기 쉬운 일이 되는 것 같았다. 얼마되지 않는 푼돈 때문에 킬러를 돕는다는 말보다는 마에다 류이치로의 친아들이 아버지의 조직을 나간 배반자의 뒤를 밟기 위해 곁에 있었다는 편이 어색하지 않았다.
"왜. 일부러 접근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우연이라고 하면 형이 안 믿을 거지."
유우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총구가 이마에 닿아있는 사람치고는 리쿠의 얼굴은 참 해맑았다.
五. 형
마피아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건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 중에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는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기억하지 못한다. 학교에 막 들어가던 나이에 리쿠는 외로움을 빠르게 배웠다. 친구 같은 건 사귈 수 없었다. 내 불운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생기면 좋겠다는 소원을 광장에 놓인 작은 트리에 대고 빌었다.
그래서 유우시의 존재가 반가웠다. 처음 복도에서 형을 본 날이 있었다. 그 방에서 들리는 말들을 들으면서 복도에 서 있었다. 낯선 형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형이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가만히 그 얼굴을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뭔가를 먼저 물어야 할까,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 하나. 형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서워 묻지 않았다.
힘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유우시가 먼저 리쿠의 앞에 멈췄다. 그리고 리쿠의 앞으로 다가와 손으로 리쿠의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두 손이 귀와 볼에 닿을 때 리쿠는 형의 얼굴을 반듯이 바라볼 수 있었다. 키가 훨씬 큰 형을 올려다보면 형의 눈동자 아래에 달린 속눈썹이 조금 젖어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조용히 떠나는 형의 등이 멀어질 때까지 보았다.
형은 리쿠와 다르게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가거나, 아버지를 따르는 아저씨들과 함께 항상 바쁘게 살았다. 어린 리쿠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형을 찾았다. 형이 일찍이 방에 들어와 있는 날이면 책을 한 권 들고 가 읽어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이 어릴 때 사줬던 공룡 모양의 인형들을 들고 가 형의 침대 위에 늘어뜨린 적도 있다.
리쿠는 형을 잘 따랐다.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몰랐다. 형이 사라진 날 리쿠는 빈방을 들여다보면서 그제야 알았다. 가끔 아버지 몰래 형의 방에 들어가 그가 자던 자리에 누워서 쪽잠을 잔 적도 있다. 형이 앉던 책상에 앉아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나무 서랍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형. 보고 싶었어."
"막지 마."
"..."
"그냥 가."
그렇게 기다리던 형의 얼굴은 예상보다도 차가웠다. 하는 말들도 그랬다. 거의 매일 형의 방을 치웠다. 형이 남긴 담배꽁초들을 치우고 남긴 식은 커피를 싱크대에 버렸다. 씻고 나온 습하고 따뜻한 욕실에서는 형에게 말하지 못할 짓을 해보기도 했다. 형이랑은 103주 동안 같이 일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같이 있다. 나는 형의 가장 좋은 협력사가 되기로 했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형이 내게 총을 겨눈다.
"막지 않아. 도와줄 거야."
"왜."
"나는 형의 파트너잖아."
말할 수 있는 이유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진짜일 때가 많다. 형이 돌아왔으면 해, 형을 기다렸어와 같은 말들이 지금의 경우에는 그렇다. 파트너라는 이유가 아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진짜는 안으로 숨긴 채 말했다. 피상의 이유를 들은 유우시의 답은 침묵이었다. 유우시는 두 번째로 총구를 그에게서 거뒀다. 이제는 아예 총을 재킷 안으로 넣었다. 사람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버티고 뜨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것에 적응한다. 이제 유우시의 눈에는 리쿠의 말간 얼굴이 훤히 보였다.
유우시가 먼저 창가로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연기를 창밖으로 흘려보냈다. 리쿠는 유우시의 뒤를 따라가 섰다. 그냥 가. 유우시가 리쿠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한 말이었다. 리쿠의 시선에서 유우시가 인식되는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런 식이다. 보통은 얼굴이 초승달만큼 보이는 각도의 뒷모습으로 보인다.
그 뻔한 형의 뒷모습을 한참 봤다. 유우시는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창틀에 눌러 껐다. 리쿠는 타버린 담배꽁초를 주워 자신의 담배 케이스 안으로 넣었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름의 직업정신이다. 리쿠가 그의 흔적을 치울 때 유우시가 리쿠를 향해 섰다.
"밥은 먹었어?"
"아니."
"나와."
창밖에 보이는 광장의 밤은 여전히 어두웠다.
리쿠는 유우시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유우시가 앞장서 걸으면 한 발 뒤에서 리쿠가 그를 따라갔다. 광장 타일 위로 얇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광장에서 골목 하나를 더 들어가면 밤새 영업을 하는 국숫집이 있었다. 유우시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국숫집 안은 작았다. 테이블은 딱 네 개. 주인인 노인은 자리에 앉는 둘을 보고 아무 말없이 국수 두 그릇을 내왔다. 리쿠는 자신은 와본 적 없는 이 작은 식당에 유우시는 혼자 몇 번이나 와봤을까 생각했다.
"리쿠."
마주한 지 한 시간쯤 되었나. 이제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리쿠는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이거 먹고 홍콩으로 가."
"형은."
"나는 몰라."
리쿠는 대답하지 않고 국수를 한 입 더 먹었다. 유우시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국숫집을 나와 골목 어귀에서 유우시가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나서는 꽁초를 리쿠에게 건넸다. 그걸 또 제 케이스에 집어넣는 리쿠를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형이 다 피운 꽁초를 치우는 거 말고도 다른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리쿠가 눈으로 말하는 것을 유우시가 읽은 걸까.
"따로 해 줄 일은 없어 이제."
"형."
"응."
"여긴 힘들어. 보통 경호원들이 문 앞에 서 있어서. 건물이 작아서 도망치기 힘들 거야. 집으로 가."
리쿠가 준 종이 뭉치들을 건네받은 유우시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것들을 펼쳐봤다. 유우시가 부탁한 류이치로의 사무실 말고 리쿠는 아버지의 저택 도면도와 경호 인력에 관한 것들을 정리했다. 그걸 받은 유우시는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리쿠."
"..."
"가."
"형은."
"..."
"형도 올 거야?"
리쿠는 대답 없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형을 만날 때는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자신만 한 키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대체 저 몸은 또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담배 케이스로 볼을 눌렀다. 형의 욕실에 있던 거울만큼이나 차다.
六. 날개뼈
코타이 스트립의 뒤편 골목은 낮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카지노 불빛이 번쩍이는 겉면에서 단 몇 걸음을 가면 그렇다. 유우시는 그 선을 넘어서 어두운 쪽으로 걸었다. 류이치로는 카지노 VIP 구역에서 두 시까지 머물다가 경호원 둘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간다. 경호원 교대는 새벽 세 시. 교대 직후 삼십 분간 순찰이 없었다. 유우시는 그 삼십 분을 기다려야 했다.
저택 외벽을 따라 움직였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보통은 셩완의 작업실에서 일을 완수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유우시는 2년간의 절차와 다른 일을 해낼 때 밤새 눈을 감고 처음 사람을 해치게 된 날 밤을 떠올렸다. 모든 방법은 양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류이치로가 만들어놓은 세계가 유우시에게 쓸모 있게 남겨준 몇 안 되는 것이었다.
저택의 내부로 들어왔다. 리쿠에게서 받은 구조도가 맞았다. 복도, 계단, 방들의 위치. 류이치로의 침실은 저택의 2층이었다. 유우시는 계단을 올랐다. 발소리를 죽였다.
이 층 복도. 침실 문 앞에 섰다.
귀를 문에 댔을 때 안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류이치로가 자고 있는 것이다. 유우시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 그리고 이어서 귀 옆을 지나가는 총성이 들렸다.
"유우시."
"..."
"난 너처럼 은혜를 모르는 부류를 악마라고 부른다."
류이치로는 자신이 말하는 악마의 날개뼈에 총알을 겨눴다. 자신을 이 세계에 떨어뜨린 존재가 있다면 대체 끝이 언제인지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 질문 안에는 부디 자신이 타락한 무지의 존재이기를 바랐다는 뜻이 있다. 날개뼈에 피가 철철 난다. 날개의 흔적을 가진 것들도 단 한 번쯤 하늘에 속할 수 있을까.
날개뼈는 그저 뼈였다.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달렸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어깨를 만지면 뜨거운 것이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우시는 층을 한 번에 뛰어내렸다. 어깨를 손으로 지혈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 손을 모두 떨어뜨리고 코타이에서 도망치는 것에 힘을 썼다. 쫓아오는 경호원들은 없었다. 유우시는 골목으로 들어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류이치로는 죽지 않았다. 유우시는 실패했다.
형도 홍콩에 올 거야?
리쿠의 말이 귓속에 여전히 있었다. 유우시는 골목 벽에 기대서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전화기를 꺼냈다. 손에 묻은 피가 화면에 번졌다. 리쿠와의 메시지 창을 열어 번호를 눌렀다가 다시 닫았다. 전화기를 다시 넣었다. 리쿠에게 전화를 걸지 않은 이유는, 리쿠를 움직이게 하면 안 됐다.
"형. 아버지 서재에 안 가면 안 돼?"
"응?"
"거기에 갔다 오면 슬퍼 보여."
"..."
"내가 아버지한테 부탁해 볼까?"
어린 리쿠의 말까지 귀에 들리는 듯했다. 혼자 움직여야 했다. 어깨를 누른 채로 미친 듯이 걸었다. 마카오의 좁고 어두운 골목이 끝없이 이어졌다. 코타이에서 멀어질수록 불빛이 줄었다. 몸에 힘이 점점 빠졌다.
리쿠는 유우시의 말을 따라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해서는 바로 셩완으로 향했다. 유우시가 셩완에 있는 이 집 말고 평소에 생활하는 다른 집이 있을 거라는 건 당연했지만 리쿠는 구룡에 있는 유우시의 집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정리해 둔 셩완의 집에서 유우시를 기다렸다.
자정이 지났다. 한 시가 지났다. 두 시가 지났다. 그 사이에 담배를 몇 대를 피웠다. 재떨이에 눌러 끈 꽁초들이 수북이 쌓일 때쯤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 들어있는 두 개의 짧은 꽁초들을 꺼내 입에 물었다. 노점상의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해지는 홍콩에서 하는 입맞춤은 비참하다.
세 시가 됐다. 아버지 쪽 사람한테서 연락이 왔다. 저택에, 간밤에 누군가 다녀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괜찮습니까?"
"네."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 리쿠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커피잔이 치워진 깨끗한 테이블 위로는 짠 눈물이 쌓였다.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그 대가로 그의 대척에 있는 누군가의 목숨이 지상을 떠났을 것이다. 목에서는 끅끅 끊기는 소리가 났다. 차가워진 핏자국을 닦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인간이 사람의 죽음 앞에서 목을 놓아 운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찰까. 그래도 염치없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아침이 밝아올 때쯤이면 눈물을 닦아낸 볼이 쓰라리기까지 했다. 유우시가 단 하룻밤도 잠을 청했을 리 없는 침대에 누워서 아픈 볼을 문질렀다. 매일 몇 분쯤 짧게 다녀갔을 침대에서 또 형의 냄새를 찾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에는 멍하니 책상에 앉았다. 창문을 마주 보고 있는 책상의 위치가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형과 같은 집에서 살 때도 형의 책상은 창문을 마주 보고 있던 듯했다. 축축해진 담배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삐그덕대는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유우시가 남긴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多謝你一路陪住我。
함께해줘서 고마웠다.
그 글은 마에다 리쿠에게 쓰인 것은 아니다. 유우시의 파트너 K에게 쓰인 글이었다. 누군가는 악필이라고 하는 글씨에 대고 또 염치없는 눈물을 한참 흘렸다. 홍콩의 더운 공기가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흘렀다. 밖에 보이는 낡은 간판과 배수구 냄새. 아무리 추하게 낡은 오래된 것들이라고 한들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낡을 새도 없던 형은 사라졌다. 리쿠는 그 지점부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듯했다. 유우시가 태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형이 마지막으로 피운 담배가 그것이길 바랐다.
들어간 지 30시간이 지나서야 셩완의 방을 나왔다. 마른 얼굴로 재킷을 입고 핸드폰을 챙겼다. 파트너에게 요구되는 처리의 범주가 무엇일까. 리쿠는 그의 미완인 임무를 해내고자 했다.
七. 628000406
류이치로는 자신의 조직 안에서 죽었다. 그것도 아들의 손으로 죽었다. 보스의 죽음치고는 시끄럽지 않았다. 류이치로의 자리를 노리던 사람들은 그의 생각보다도 많아 조직은 거의 와해되었다. 초라한 죽음에 리쿠의 얼굴엔 다시 쓴웃음이 나왔다. 리쿠는 이제 그런 얼굴을 숨겨야 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 얄팍한 해방감을 느꼈다.
리쿠는 그 이후의 일들을 대부분 기억하지 않았다. 재판을 받았고 판결을 받았다.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를 제거했다는 것은 정의라는 것 안에서 참작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패륜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변호인도 없이 참석한 재판에서 리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도소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셩완의 창문보다도 작았다. 보이는 것은 마주하고 있는 건물의 회색 벽이었다. 그 벽은 까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미학적으로 세나도의 건물보다는 갇혀있는 이곳이 나은 편이었다. 창문 앞에 서면 셩완과 같은 냄새가 났다. 빗물 냄새와 콘크리트 냄새. 그 냄새를 맡는 것은 리쿠에게 유일한 행복이었다.
형 지금 나는 홍콩에 와있어.
5년이 지나도 유우시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50년쯤 살다가 좁은 방에서 인생의 엔딩까지 보게 된다면 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류이치로의 학대와 범행, 그리고 교도소에서 소동을 피우지 않았다는 다소 유치한 이유로 5년 만에 나왔다.
출소하고 리쿠는 바로 셩완으로 갔다. 바뀐 것은 없었다. 유우시가 없어진 자리는 그를 제외하고는 똑같았다. 천천히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른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씹으면서 골목들을 걸었다. 바닥에 느껴지는 콘크리트의 온도나 피부에 달라붙는 습기 같은 것들이 자신이 홍콩에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게 했다.
골목 모퉁이를 돌 때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happy together. 자주 가던 식당이었다. 리쿠는 그 안으로 들어가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유리 진열장에 붙은 수십 장의 쪽지들을 보았다.
招聘。做嘢好嘅人。請打呢個電話。
구인. 일 잘하는 사람. 연락은 이 번호로.
유우시가 붙여둔 쪽지를 떼지 않고 번호만 기억하기를 잘했다. 형이 써둔 글씨를 보고 손바닥만 한 노란색 종이에 볼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쪽지를 살폈다.
628000406.
그때 번호를 기억해 두길 잘했다. 인간에게 망각은 축복이라고 한다. 때로는 정반대의 말들이 인생을 관통할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 리쿠는 반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