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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메리지

​코이

 

너희 결혼은 안 할 거야?

해야지.

언제?

언젠가는.

 

연애하는 10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해왔던 레퍼토리다. 그리고 항상 두루뭉술하게 대답해온 언젠가는. 10년째가 되니까 이제는 구체성 있는 대답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좀 오래 걸리긴 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다들 얼큰해지면 너네 헤어져도 우정은 변치 말자는 소리가 막잔 건배사로 장식되곤 했다. 고딩 때부터 친구들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있으면 집어먹는 마른안주처럼 가볍게 씹히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2년 전, 대학 동기의 결혼식 뒤풀이에서 어떤 선배가 술 마시고 떠들어대던 말이 생각난다. 결혼이 백년가약이잖아. 백 년 동안 한 사람이랑만 붙어먹으래. 이건 진짜 미친 짓이지. 얘들아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알았지?

 

남의 잔칫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참. 바람 나서 이혼했단 얘길 들은 참이라 그냥 흘러들었는데 결혼에 대해 깊생 하다 보니 곱씹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결혼은 신중히. 결혼을 괜히 인륜지대사라 하겠는가. 자유로웠던 두 사람의 인생이 하나로 묶이는 종신계약과도 같은 거라 연애보다는 훨씬 부담스럽긴 했다.

 

연애 10년 차. 그중에 절반을 함께 살았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지만, 10년을 만났어도 여전히 불확실한 사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년을 만났음에도 안달이 나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곁에 두려면 결혼 말곤 다른 답이 없다. 그치만 결혼이란 게 나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리쿠는 꽤 오랫동안 주파수를 맞춰 왔다. 들쑥날쑥한 잡음이 모두 사라지던 날. 이제는 정말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 거창하게 하는 것도 오글거려서 소박하게나마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대망의 프러포즈 데이. 눈물이 안날 줄 알았는데 주책맞게 오열하고 말았다. 10년 연애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탓이다. 무슨 에피소드가 원피스급이네. 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쉬운 길에서 삽질하고, 복잡한 길은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그런 연애를 했다. 이게 다 한 치 앞만 보고 앞장서서 걷는 누구 때문이지만. 리쿠는 자신이 망원경으로 쓰이는 게 속 편했다. 그런데 그 망원경도 가끔씩 오작동을 일으키는 게 문제라서. 서로 조금 모자라고 조금 뛰어난 부분들을 맞춰가며 지나갔더니 얼렁뚱땅 일이 해결되기는 했다. 다 지나고 나서 그땐 그랬지, 웃어넘길 만큼 단단하게 영글었고. 함께라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리쿠는 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꼭 붙잡았다. 셀 수 없을 만큼 잡아본 손인데도 떨려죽겠다. 희고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를 껴주는데 울컥해서 눈물이 팍 터졌다. 다 끝나고 울지. 지금 터질게 뭐람. 안아주는 품이 따뜻해서 더 울었다. 마주 안으려는데 진동하듯 떨리는 몸이 느껴진다. 뭐야... 너도 지금 울고 있어? 오... 이런. 울고만 있을 게 아니라 얘부터 달래줘야지. 벅찬 감정 억누르면서 젖은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순간,

 

오마에.

인생 하이라이트 순간에도 너란 녀석은.

 

두 사람의 배경으로 각자 상황에 걸맞은 음악이 흐른다. 주인공 인생 좆 될 때 흘러나오는 비장한 음악과 마찬가지로 좆 된 상황인데 그게 주인공이 아닌 악당일 때 흘러나오는 통쾌한 음악. 프러포즈 하느라 똥폼 잡고 꿇어앉아 수문 개방한 댐처럼 눈물 콧물 모두 방류한 한 남자의 얼굴이 푸석하게 메말라 가고 있었다.

 

제 딴에는 산통 깨지 않으려고 음소거한 건 칭찬할만했지만, 기본적으로 웃을 때 보이는 치아 18개. 그런데 지금은 족히 20개는 넘어 보인다. 완전한 잇몸 개방. 활ㅡ짝.

 

"리크흡... 크하히힛."

"......"

"우니까 멋없어."

 

누군 북받쳐서 처울고, 누군 웃느라 처울고. 반지도 받아주고 청혼도 받아줬지만, 우리 연애사에 가장 찬란해야 할 순간은 불발된 폭죽처럼 아쉬운 순간으로 남았다. 그래도 이후 결혼 준비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어도 리쿠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메리지 블루라는 거 흔히 겪을 수 있는 증상이라곤 하지만, 그게 제 연인에게도 해당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 날짜가 잡히고 얕은 우울에 빠져가던 녀석은 점점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리쿠는 날마다 그를 건져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한순간에 변할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제 사람을 통해 깨닫고 싶진 않았다. 한낱 감정에 쉽게 매몰되지 않던 녀석이 이러니까 더 겁이 났던 거 같다.

 

자꾸 비집고 들어오려는 나쁜 생각을 애써 무시하고 온 신경을 쏟았다. 밤낮없이 센서가 달린 듯 작은 인기척에도 반응했다. 리듬이 깨지고 피로가 누적된 것도 모른 채 리쿠는 어떻게든 우리를 지켜내고 싶었다. 단 한순간. 거의 기절이었지. 까무룩 잠들었던 그날,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람 쐬고 온다는 쪽지 한 장만 띨롱 남겨둔 채 기어이 아가미를 열고 잠수를 탔다.

 

그렇게 토낀 금쪽같은 반쪽을 찾아다닌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처음엔 일본에서만 자잘하게 옮겨 다녔는데 세 번쯤 찾아냈더니 해외로 구역 확장해버린 웬수 같은 반쪽.

 

마에다 리쿠는 증기 뿜어내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흥신소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번엔 꽤 어렵게 찾았습니다. 염색을 또 하셔서 못 알아볼 뻔했거든요. 헛웃음이 난다. 지가 무슨 카멜레온도 아니고 머리털은 왜 자꾸 바꿔대고 지랄인지. 이번에 만나면 머리털부터 죄다 밀어버리든가 해야지. 빡빡이여도 귀여운... 짝짝짝.

 

이것은 박수 치는 소리가 아니다. 애정과 증오가 비례하는 연인 생각으로 습관적 웃음을 짓는 안면 근육에 매타작 갈기는 소리다. 정신 차려라. 뒤통수를 그렇게 처맞고도 귀엽다는 생각을 하냐. 이번엔 진짜 담판을 지으러 가는 거다. 붙잡아다 결혼을 하든, 파혼을 하든. 더는 피 말리는 술래잡기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리쿠는 흥신소 탐정이 적어준 종이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성질나서 꼬깃꼬깃 구겨버린 종이를 다시 펴느라 사서 고생 중이다.

 

• 의뢰 대상 : 토쿠노 유우시

-현재 대만 타이베이 중정구 G 호텔 투숙 중

-시먼딩 소품점 샤오마오 근무 (13:00~17:00)

• 주로 가는 곳(★단골)

- 시먼딩 : TOMATO(훈툰,토달볶)★

- 시먼딩 : ***(우육면)

- 시먼딩 : ***(버블티)

- 난지창야시장 : ***(물만두)

- 닝샤야시장 : ***(고구마볼,오징어튀김)

 

다 읽고 난 쪽지를 이번엔 곱게 접어서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 든 것을 꺼내서 확인한 리쿠는 기가 찼다. 치아는 안 보이지만, 발그레한 볼이 살짝 솟아오를 정도로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제 연인의 얼굴이 어쩐지 수줍어 보였으므로.

 

치앙마이에서는 무난한 갈발, 다낭에서는 찌르면 파란 피가 나올 거 같은 머리라 적응이 안 됐는데 이번에 바꾼 머리색은 퍽 잘 어울려서 눈길이 갔다. 금발로 물들이고 살짝 다듬어서 동글동글한 머리통, 동그란 뿔테안경을 쓰고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정말이지... 존나게 귀엽다. 이 귀여운 얼굴을 대체 어떤 새끼한테 보여주고 있는 거야. 다낭에서 해피 벌룬 빨고 실실 쪼개던 얼굴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뽀뽀를 참을 수 없는 얼굴.

 

어느 순간부터 사진 속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손가락이 처량해 보인다. 하아. 묵직한 숨을 허공에 뿌리며 핸드폰을 꺼내든 리쿠는 제일 빨리 출발하는 타이베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

 

와, 디지게 덥네. 타오위안 공항에서 픽업 택시를 타는 짧은 순간 체감한 대만 날씨는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얘는 왜 더운 나라로만 다니는 걸까. 추운 거 싫어하는 거 잘 알지만, 더운 거 못 견디는 리쿠에게 대만의 여름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적정 사우나 온도를 넘어섰다. 애초에 이 나라까지 오기 전에 하네스라도 채워서 잡아두는 건데. 너 지금 방심했네? 어디 한번 좆돼봐. 이런 식의 운영 정말 지긋지긋하다.

 

다 잡은 녀석을 공항에서 또 놓쳤을 때는 진짜로? 깜카 아니고 진짜, 리얼, 실제 상황? 리쿠는 집으로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했다. 꼴딱꼴딱, 숨넘어갈 때쯤 누나가 엽서 하나를 손에 쥐여줬다.

 

리쿠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이 전부였지만 홀연히 떠난 유우시가 처음 남겨준 메시지라 얌전히 기다렸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긴 하는데.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 존재의 부재로 인한 상실과 공허함 따위 떠난 사람은 알기나 할까. 아는 놈이었으면 진작에 돌아왔겠지.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면 그걸로 며칠은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너 이렇게 독한 구석이 있었네. 우리 이 정도로 떨어져 지낼 수 있다고 언제부터 생각했던 거야. 10년이나 겪었으니 너를 제일 잘 아는 건 나라고 자부했는데 참 경솔한 생각이었다. 드디어 완성이구나 싶었던 유우시 사용 설명서는 또 내용이 추가됐고 수정사항이 생겼다. 여전히 미완성이라 참고만 할 수 있는데. 지금 불안한 건 너를 덮친 파랑의 이유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다 필요 없고 이것만 머릿속에 박아놔. 심각한 문제 아니야, 리쿠.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줄 네가 필요해.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가 돼가자 기다리는 거 더는 무리. 그래서 유우시를 매번 찾아줬던 흥신소를 또 찾아갔다. CIRO 출신이라더니 탐정님 실력은 허언이 아니었고 유우시를 금방 찾아줬다. 물론 유우시가 핸드폰이며, 카드를 써대며 흔적을 많이 남기고 다녀서 찾기 쉬웠다곤 하지만 계속 쫓아다니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런데 도망도 계속 치다가 잡히다 보면 경험치가 쌓이고 스킬도 해금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유우시가 더는 본인 명의로 된 카드를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면서 먹고사는 거야.

 

비행기에서 쪽지를 닳도록 읽던 리쿠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건가. 유우시는 제 걱정과 달리 머나먼 타국에서 일까지 하면서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주로 간다는 곳에 전부 먹으러 가는지 메뉴 적혀 있는 거 보고는 실없이 웃어버려서 자존심이 상했다. 거기다 얼마나 들락거렸으면 단골까지 된 거야. 하여튼 유우시 다웠다.

 

리쿠는 유우시가 머물고 있다는 G 호텔에 숙박했다. 처음 도망갔던 치앙마이 에어비앤비에서 엄지발가락만 한 벌레들의 습격을 겪고 제 이름을 울부짖으며 살충제를 뿌려대던 사건을 교훈 삼았는지 이제는 어딜 가든 호텔에서만 묵는다.

 

대만은 리쿠도 처음이라 푹 자고 일어난 다음날, 주요 관광지 투어를 시작했다. 융캉제에서 간단히 우육면으로 끼니 때우고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택시를 타고 중정기념당으로 갔다. 이때부터 적당히 싸돌아다녔어야 했는데. 다음 목적지로 용산사 가서 구경하고, 근처 화시지예 야시장에서 루러우판 먹고 광저우제 야시장까지 구경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발이 아파서 야시장에서 발 마사지까지 받고 쌓인 피로를 풀자마자 이번엔 타이베이 101 전망대로 향했다. 타이베이의 야경을 담아내는 리쿠의 눈빛에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고생이 취미인데 고생시키는 사람이 자리를 비워 그런지 남들 2, 3일 걸릴 일정을 하루 만에 소화해버렸다. 7월의 한여름 뙤약볕과 미저리처럼 들러붙는 습기를 몸에 두르고 특훈 받듯이 관광했던 리쿠는 결국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제대로 된 더위를 맛보고 과부하에 걸린 몸뚱이가 스스로 전원을 off 했다. 꼼짝도 못 하고 다음날은 하루 종일 호텔방에 누워 있었다. 그래도 몸만 힘들뿐이지 마음이 불안하거나 답답하거나 긴장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태평할 수 있는 이유도 어찌 됐든 유우시랑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호텔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겠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몰래 보러 갈 수 있으니까.

 

나흘째.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못했지만 리쿠는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오늘은 유우시를 미행할 생각이다. 나름 분장하고 1층 로비에서 숨어 있었다. 유우시가 언제 나올지 몰라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느라 하품이 연신 터진다. 하품 때문에 고인 눈물을 훔쳐내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금발머리가 시야에 잡혔다. 뻗친 머리 위로 빵모자 턱 얹고, 크로스백 양손으로 꼭 붙들고 걷는 폼이 딱 봐도 토쿠노 유우시. 현재 시간 아침 9시. 반가워할새도 없이 조금만 늦장 부렸어도 놓칠 뻔했단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소 11시쯤 일어나는 녀석인데 어딜 가길래 아침 댓바람부터 나온 건지. 리쿠는 닌자처럼 따라붙었다.

 

개덥다 진짜. 숨이 턱턱 막힌다. 5분 걸었나.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유우시는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따라갔다가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유우시를 발견하고 급히 몸을 숨겼다. 자전거 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동네 한량처럼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유우시의 등짝만 멀거니 쳐다보던 리쿠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시먼딩이었다.

 

먼저 도착한 리쿠는 단골가게라던 TOMATO 근처에서 유우시를 기다렸다. 그냥 느낌에 여기로 올 거 같았다. 땀 뻘뻘 흘리면서 20분쯤 기다렸더니 자전거를 탄 유우시가 나타났다. 가게는 아직 오픈전이라 Close 팻말이 붙어있는데 익숙하게 자전거를 출입문 옆에 세워둔 유우시가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에? 그때 가게 안쪽에서 뿌까 머리를 한 여자애가 뛰어나와 문을 열어준다. 여자애는 유우시의 어깨를 감싸안고 안쪽으로 사라졌다가 혼자 다시 나와 블라인드를 치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야?

 

도망간 수 잡으러 왔다가 바람난 수 목격해버린 마에다 리쿠는 집착싸패공으로 낯짝을 갈아끼웠다. 무표정일 때 그다지 친근한 인상이 아니라서 항상 허물어져 있는 얼굴부터 제대로 굳혔다. 거기다 치켜뜬 눈까지 매섭게 희번뜩거리자 두 배 정도 사나워졌다. 돌아버리게 더운 날씨. 미치기 딱 좋다. 다 죽자.

 

성큼성큼 걸어서 문 손잡이를 있는 힘껏 밀어버린 리쿠는 어떤 저항도 없이 가게 안쪽으로 불쑥 침입했다. 문이, 열려있었네. 그렇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이 문 열라고 지랄쇼 한바탕해야 하는데 예상과 달리 기름칠 잘 된 문이라 중심이 그대로 앞으로 무너졌다. 삐끗한 마루운동선수처럼 고꾸라진 리쿠는 앞구르기를 두 번하고 차디찬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하악!!!"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이 너무 놀란 리쿠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토, 토시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여긴 대만이잖아. 분명 익숙한데 기괴하고 섬뜩하기까지 한 얼굴. 밀가루를 뒤집어쓴 거처럼 하얀 얼굴의 토시오가 리쿠를 보고 활짝 웃기 시작한다. 만개한 치아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빨간 흔적들. 피...? 피!!! 흰자를 까뒤집고 몸을 부르르 떨던 리쿠의 시야가 그대로 블랙아웃 됐다.

 

***

 

죽은 거야? 아니, 살았어. 근데 왜 눈을 안 떠? 곧 깨어날 거야. 흑, 리쿠... 리쿠우... 나는 리쿠가 필요해... 화장 번져, 그만 울어. 화장 번져서 나 못생겨졌어? 아니. 그럼 어떤 거 같아? 평소랑 똑같아. 평소는 어떤데? 귀여워. 귀엽다는 건 못생기지 않았다는 건가? 어휴, 그래 너 잘 생겼다. 푸히힛.

 

원하는 대답을 고집스럽게 이끌어내는 슈크림처럼 달콤한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다. 반면 영혼 없이 대답하는 걸걸한 목소리는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꿈인가.

 

근데 린... 리쿠 어디 많이 아픈 건가? 얼굴이 핼쑥해졌어. 아니.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너의 남친은 모든 것이 옳게 된 사람이다. 더위를 먹었을 뿐 괜찮다. 부럽구나 유우짱.

 

상대의 걸걸한 목소리에 영혼이 실리자 중저음의 바리톤처럼 중후했다. 유베날리스의 격언이 한편의 오페라 대사처럼 들리는 와중에 유우시의 목소리는 세상 가볍게 흩날린다.

 

"하오하오. 쎼쎼, 린따거."

 

아 뭐야 개웃기게. 언어는 기세야. 기세와 다정함이야. 외국인 꼬마와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우쭐해하며 말하던 유우시가 떠오른다. 어느 나라를 가든 미취학 아동의 언어 수준으로 말하지만 말투가 귀여워서 그런지 곧잘 먹히는 유우시였다. 굵직한 목소리를 따라 해보고 싶었는지 성대에 잔뜩 힘을 준 목소리가 웃겨서 빵 터질 뻔했다. 아아... 지금 웃으면 안 돼.

 

"근데, 네 남친 말이야. 깬 거 같은데... 안 일어나네."

"에? 진짜로?"

"아악! 아야얏."

 

일순 인중에 메다 꽂힌 벼락같은 따끔함에 리쿠의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눈이 퍼뜩 떠졌다. 확장된 시야 아래로 대바늘 같은 것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우와! 리쿠 깼다! 깼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신명나는 박수소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시커먼 손이 다가와 대롱대롱 거리는 바늘을 쏙 뽑아갔다.

 

"리쿠 괜찮아?"

 

코앞으로 쓱 나타난 얼굴에 겨우 잡은 정신줄을 또 놓칠 뻔했다. 흐익. 기겁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 리쿠의 손을 축축한 손이 주무르기 시작한다. 아... 이 익숙한 감촉.

"나야 나. 나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아이씨 깜짝아... 그 허연 밀가루칠이나 지우고 오던가. 슬그머니 다시 눈 뜨고 유우시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진짜 울긴 울었나 보다. 토시오 분장의 아이 메이크업이 번져 판다로 변한 데다 흰자도 핏발이 서 있었다. 리쿠가 한숨 돌리며 심장을 달래는 동안 마찬가지로 안도한 유우시가 이내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캄다운하던 리쿠의 심장이 또 경기를 일으킨다.

 

"너! 너어! 입에, 그거, 빨간 거."

"아, 토마토 껍질 꼈나 보다."

 

혀끝으로 치아를 요리조리 훑어내던 유우시가 다시 이~ 소리를 내며 고른 치아를 전부 보여준다. 끕딜 으딕드 끄이뜨? (껍질 아직도 껴있어?) 응, 송곳니 쪽. 아잇, 물로 헹구고 와야겠다.

 

유우시가 총총 뛰어서 어디론가 사라지자 금세 적막이 깔린다. 리쿠의 주변으로 편치 않은 공기가 흘러들었다. 왠지 스산한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뿌까 머리를 한 여자애... 그니까 여잔데. 여자였는데.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도 아니고. 멀리서 봤을 때는 여자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남자였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춘리 옷을 입고 쩍벌하고 있는, 다리털이 무성한 남자.

 

"와. 진짜로 잘 생겼네요. 유우시가 망돌 사진 보여주면서 남친이라고 뻥치는 줄 알았는데... 저는 왕장린입니다."

"... 저는 마에다 리쿠입니다."

"오늘 우리 한거... 아, 왕한이라고. 제 형님이에요. 오늘 생일이라 깜짝파티하려고 유우시랑 같이 분장했어요. 마에다 군도 함께하시겠어요?"

"아아... 네네."

 

오해는 순식간에 풀렸다. TOMATO가 유우시의 단골 가게인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주인장들이라 타국에서 모국어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훅 치고 들어온 유우시가 그들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런 유우시를 귀찮아하지 않고 꽤 아껴주면서 돌봐주고 있었다.

 

깜짝파티에서 리쿠는 긴 머리 가발만 썼다. 테이블 밑에 숨어있다가 두 사람이 먼저 놀래키고 나중에 나타난 리쿠가 또 한 번 놀래키는 게 계획이었다. 계획은 반쯤 성공했다. 두 사람한테는 놀라지 않던 한거가 리쿠에게는 깜빡 속은 것이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가동 중이었어도 두꺼운 천으로 둘러싸인 테이블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으니 땀이 질질 났다. 그 바람에 뒤집어쓴 가발이 얼굴로 죄 들러붙어 바야바 같았다.

 

식겁한 한거가 던진 숟가락에 마빡을 맞았지만, 빵 터져서 킥킥 웃던 유우시가 쥐가 났다고 옆구리를 부여잡는 통에 달려가서 풀어주느라 아픈지도 몰랐다. 정신없는 이벤트가 지나가고 리쿠는 작게 혹이 난 이마를 문지르며 넋을 놨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영혼이 탈탈 털렸다. 축하해 줘서 고맙다고, 밥해주고 싶다는 한거의 말에 유우시와 중앙 테이블에 앉았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뭐해줄까? 다 골라봐."

"뭐 고를 거 같아요?"

 

유우시의 말에 리쿠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역질문하면서 놀기 신청하는 유우시의 대화법을 아는지라 리쿠의 손이 유우시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볍게 쥔 얇은 손목을 엄지로 살살 쓸면서 적당히 하란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아까 깼을 때 들었던 장린과의 대화는 잘 넘어간 듯했어도 질려 하는 기색을 얼핏 느낀 터라 이 형제들이 유우시에게 그동안 어지간히 시달려 왔겠구나 대강 짐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화법을 완벽 마스터한 리쿠도 유우시 언어 영역 99점 맞을 때가 있는데. 저들은 쪽지시험 경험도, 비교 예시도 적지 않은가. 리쿠는 눈 감기 전 분명히 확인했다. 한거의 미간에 주름 세 개가 잡히는 것을.

 

쎄한 느낌의 오류는 빈번하지 않다. 동물적인 촉은 야생과도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휘되는 방어본능이다. 무시하는 것보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밥은 좀 편하게 먹고 싶었는데. 리쿠의 머릿속으로 상황에 따른 매뉴얼들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유우시와 있으면 종종 휘말리는 일이라 어렵지 않게 대비한다.

 

"딴삥?"

"땡!"

"미소탄탄면?"

"땡!"

"하, 마라우육면!"

"땡!"

 

아레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똥촉이었나. 아니 뭐야, 저 형님. 지금 즐기고 계시잖아? 별안간 눈앞에서 펼쳐진 메뉴 맞추기는 끊길 듯 말 듯 몇 번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평온하게 티키타카 중이거늘 리쿠는 한거의 표정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혼자 살얼음판 위를 걷는 중이다. 한거의 얼굴빛이 점점 붉어지고 있어서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우짱 너... 너무 땡을 남발하고 있는데. 적당히 하라고 제발.

 

"크잇! 나 안해안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한거가 소리치자 벌떡 일어난 리쿠가 바로 중재에 나섰다. 콧잔등을 찡긋, 눈웃음을 살살. 웃으면 백퍼 먹히는 유들유들한 웃음 달고 친근하게 형님 형님. 이 친구 지금 형님하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친하고 편한 사람한테 놀아달라고 장난 잘 치거든요. 사랑 많은 친구라 형님한테도 애정 있는 거 느껴지시죠? 하하하. 화 푸시고 이해해 주세요. 음식은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다 잘 먹습니다. 리쿠는 유우시를 제 뒤로 숨긴 채 우리 아이 나쁜 아이 아니라고 변호하기 바빴다.

 

"흐음... 불닭, 훈! 툰!"

"......"

"딩~동~댕~!"

"......"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는 사람처럼 미간을 붙잡고 있던 한거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톤으로 불닭훈툰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 가냘픈 목소리의 딩동댕이 리쿠의 뒤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야~ 남친 뭐야, 개뿜, 아니아니. 짱 설렌다 유우짱."

 

주방에서 국자 들고 빼꼼히 고개 내민 장린이 입술 주변 근육을 씰룩거리며 허공으로 연신 엄지척을 날려댔다. 이 인간들이 진짜.

 

"리큭, 여기 진짜 맛이썹. 푸흡."

 

안 봐도 지금 치아 18개 이상. 다리 뻗고 누울 자리 하난 기가 막히게 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유우시의 손을 풀어내려는데 한거가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인다. 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 자기 와서 좋은가 봐. 그 말을 들은 리쿠의 손이 맥없이 탁 풀린다. 광대가 리프팅 되는 건 덤이다. 힘은 침대에서나 쓰고 열받은 건 식히면 그만. 전의 상실한 마에다 리쿠는 오늘도 패배한다. 지고서도 화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음식이 나올 동안 리쿠는 유우시만 쳐다봤다. 유우시는 식당 천장 봤다가 벽지 봤다가 소스 통 봤다가. 단골이라면서 꼭 처음 와본 관광객처럼 여기저기 시선을 준다. 대화 좀 해보려고 시동 거는데 음식이 또 금방 나왔다. 이타다키마스! 음식 나오고부터는 그릇에 코 박고 먹기만 한다. 매일 먹었을 음식인데도 맛있어 죽겠는지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천천히 먹어. 끄덕끄덕. 맛없는 거 먹을땐 리쿠를 반찬 삼아 먹는데 진짜 맛있는 거 먹을땐 눈길도 안 준다. 양껏 먹고 나면 볼록 튀어나온 윗배 쓰다듬으며 리쿠도 맛있게 먹었는지 꼭 확인한다. 리쿠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로 눈 마주치고 보고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못 봤어. 씹천사 얼굴.

 

음식은 전체적으로 유우시가 좋아할 만한 매운맛과 짭짤한 맛이 특징이었지만, 유우시가 따로 주문해 준 시오 주먹밥과 시그니처 메뉴인 토달볶은 리쿠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배고팠던지라 다 먹어치운 빈 그릇이 점점 늘어났다. 허기졌던 배를 가득 채웠더니 곤두서있던 신경이 누그러진다. 예민할 때마다 뭐 찾아 먹는 유우시가 단번에 이해됐다. 리쿠는 중년 남미새 아들맘의 눈을 하고 유우시를 쳐다봤다. 윗배를 둥글게 쓰다듬던 유우시도 눈을 홉뜨고 벌새 날개처럼 속눈썹을 파닥거리며 리쿠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대화했다. 여기 맛있지? 응. 진짜 맛있다.

 

"유우짱, 남친이랑 놀아. 형수님한테 너 쉴 거라고 말해놨어."

"에... 안 그래도 되는데..."

 

알고 보니 유우시가 근무하는 소품점도 한거의 아내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예쁨 받고 살았길래 먹을 거도 챙겨주고 일할 곳도 챙겨주고. 10년 동안 유우시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눈도 못 떼고 살던 리쿠는 상상도 못할 전개였다.

 

"그럼... 이만 나갈까?"

"응."

 

음식값을 지불하려다가 등 떠밀려서 쫓겨났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또 와. 네에-. 둘이 합창하듯 대답하면서 밖으로 튕겨 나왔다. 나오자마자 습한 무더위가 망토처럼 씌워진다. 리쿠 더우니까 차 타고 다니자. 유우시가 오늘 한 말 중에 가장 예쁜 말이다. 미리 불러 둔 건지 우버가 금방 도착했다.

 

"고마워. 와... 대만 너무 덥다. 넌 안 더워? 땀 많이 안 흘리는 거 보면 진짜 신기해. 근데 좀 시원한 나라로 다니지. 태국 갔다가 베트남 갔다가. 이번엔 대만이네. 왜 계속 더운 나라로만 다녀? 여기가 근데 최고 더운 거 같아."

 

우버를 타자마자 리쿠의 입이 터졌다. 더위 먹은 게 아직도 여전한 건지. 우리 지금 이 정도의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근한 온도가 아닌데. 예열이 덜 되었단 자각은 있지만 입이 멈추질 않았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입안이 떫어지고 기분도 껄끄러워지고. 유우시가 리쿠를 쳐다보며 고저 없이 말했다.

 

"리쿠가 쫓아올까 봐."

 

오래된 연인 특, 서로의 표정만 봐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 이게 연애 3년 차 때는 참 쓸모 있고 좋았는데 지금은 영 쓸데없는 능력이다. 뻔뻔하지도 얄밉지도 않은, 누굴 골탕 먹일 때의 얼굴도 아니다. 딱 베이직한 얼굴. 오해한다면 그건 상대의 몫이니까 굳이 이해시키려 들지 않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부드럽게 굴러가는, 다정한 말들만 하는 사람이 토쿠노 유우시다. 싸울 때도 흥분에 못 이겨 날선 말이라도 할까 봐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 헤어지잔 말을 들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건데.

 

리쿠는 이제껏 유우시가 했던 말들 중에 가장 서운한 말을 들었다.

 

 

 

 

 

 

 

 

 

 

 

 

 

우버 안의 소음이라곤 에어컨 바람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내비 안내음이 전부였다. 리쿠는 창밖만 바라보다가 시야 끄트머리로 계속 밟히는 시선을 모른척했다. 룸미러로 힐끗대는 우버 기사는 운전에 신경 쓴다기보단 뒷좌석에 앉은 손님들을 더 신경 쓰는 거 같았다.

 

세 번째로 차가 급정거하자 리쿠는 침착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안전벨트 클립을 홀더에 끼우면서 본 유우시는 이미 안전하게 벨트에 묶인 채였다. 언제 했대. 웃겨 진짜. 하지만 웃을 수 없다. 웃지 않는 제 얼굴의 인상이 어떤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제3자가 느끼기엔 숨 막힐만한 공기와 불편한 침묵일 것이다. 차에 타자마자 나눈 대화를 끝으로 둘 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우버 기사는 쓸데없이 감응이 뛰어난 사람인지 리쿠의 작은 몸짓에도 반응하며 연신 룸미러를 흘긋댔다.

몸에 잔재하는 열기도 텁텁하고 분위기상 환기도 필요해서 창문을 내렸다. 차가 달리는 중이라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꿉꿉한 바람이 안으로 들이쳤다. 곧바로 우버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熱嗎?"

"......"

"덥냐고... 기사님이 물어보는데?"

 

리쿠는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좌석에 파묻히듯 몸을 늘어트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에어컨 바람이 더 강해진 거 같다. 표정 풀어주는 것쯤 일도 아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피곤했다. 눈 감고 있던 리쿠는 그대로 수마에 빠졌다.

 

 

"리쿠우... 아 어떡해.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봐. 응?"

 

수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리쿠의 눈꺼풀이 무겁게 들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땀도 잘 안 나는 애 얼굴이 땀과 눈물범벅이다. 입술 안을 파고드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씹어서 삼키라고 유우시가 말했다. 리쿠는 그대로 씹었다가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쓴맛에 온 인상을 찌푸렸다. 물, 물 마셔. 빨대가 입에 물리자 있는 힘껏 빨아마셨다. 우롱차 맛이 은은하게 맴도는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하아... 됐다, 됐어. 조금만 더 자. 괜찮아질 거야."

"......"

 

리쿠 고멘...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모든 게 괜찮아졌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수마가 덮쳐온다. 리쿠는 또다시 잠들었다.

 

 

꼬르륵. 뭔 소리지. 꼬르르륵. 천둥 같은 소리가 이번엔 제법 크게, 길게 울린다. 리쿠는 감고 있던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살짝 떴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닌 거처럼 무겁던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발끝에 힘을 주고 기지개를 시원하게 켠 리쿠가 소리의 출처를 찾는다. 옆에서 곤히 잠든척하고 있는 씹천사가 보인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하여튼 귀여워. 뭐 먹을 때, 웃을 때, 잠들었을 때 제일 예쁜 얼굴.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 보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 눈에 새기듯 하나하나 살펴보게 됐다. 원래는 눈 뜨면 보던 당연한 얼굴이었고 일상이었는데.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바라게 될 정도로 갑자기 이 순간이 엄청 소중하게 느껴졌다. 얼굴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닫혀있는 눈꺼풀의 떨림이 속도를 더한다. 아직도 얼굴 보기 싫은가. 쫓아올까 봐 더운 나라로만 다녔다는 거 솔직히 너무 큰 상처였다.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그랬을까 싶고.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꼴 보기 싫었을까 싶고.

 

그렇지만. 아까 깨어났을 때 들었던 미안하다는 목소리는 또 너무 진심이어서. 그 진심을 알아챌 수 있는 세월을 허투루 보낸 것 같진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리쿠는 유우시의 얼굴에 있는 점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고 꾹 참고 있었던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쪽.

 

뽀뽀하자마자 번쩍 뜨인 눈과 마주쳤다. 더 하고 싶은데 지금은 눈 뜨게 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뽀뽀로 끝낸다. 꾸르르륵. 일단 더 급한 불부터 꺼야 하고.

 

"밥 먹으러 가자, 유우짱."

 

***

 

유우시는 리쿠한테 괜찮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난 얼굴이 특유의 건강했던 혈색을 되찾았고. 티 내지 않았지만, 처음에 봤을 때 놀라게 했던 찌든 피로감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의사인 장린이 챙겨줬던 환약이 아주 용했다.

 

네 남친 더위를 제대로 먹은 거 같은데 계속 기운 없어 하면 이거 챙겨 먹여. 꼭 씹어서 삼켜야 돼. 그래야 약발 바로 선다.

 

리쿠가 우버에서 쓰러졌을 때부터. 아니. 리쿠의 곁을 떠나올 때부터 유우시는 후회하고 있었다. 대화하면 돼. 대화해 보자. 하지만 이미 상해 버린 마음을 복구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러는 와중에 제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는 리쿠가 거슬렸고. 수선거리는 마음을 정리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떠날 마음을 먹었다. 리쿠가 쫓아오지 않길 바랐지만, 쫓아오지 않으면 또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다. 찾기 어려울까 봐 카드를 쓰고 흔적을 남기고.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잘 안됐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리쿠는 끊임없이 유우시를 찾아내고 도중에 도망가서 속을 뒤집어놔도 포기할 줄을 몰랐다. 리쿠와 사귀면서 유우시는 을이 되고 싶었다. 나도 져주고 싶다고. 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유우시는 모태 갑이었다. 게임이나 내기에서 지는 건 지든 말든 쿨하게 넘겼지만, 심정이 상하니까 을이고 뭐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뻔한 막장드라마 대사를 뱉고 싶어서 입이 멋대로 나불거릴까 봐 잠시 떨어져 있기를 택했다. 가오 상한 갑만큼 모양 빠지는 게 또 없으니까.

 

그렇게 도망쳐 온 곳에서 혼자 있으려니까 지랄맞게 심심했다. 역시 같이 놀 때 제일 재밌고, 가장 잘 놀아주는 사람도 리쿠란 걸 깨달았다. 그랬는데. 그걸 다 깨달아놓고도 그렇게 모서리 삐쭉 솟은 못된 말을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지금의 심정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 이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살이 내려서 턱선이 도드라진 얼굴이 안쓰러워 죽겠는데, 그로 인해 더욱 날렵해진 얼굴이 섹시해서 미치겠다. 유우시는 검색창에 깜박거리고 있는 커서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아... 나 뭐하려고 했지.

버블티를 주문하려고 줄 서있는 리쿠가 다음 분 주문하란 소리에 옆에 서있던 여자들에게 양보하듯 먼저 주문하라고 손짓한다. 여자들이 활짝 웃으며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 같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우시는 갑자기 사막 한가운데로 뚝 떨어진다. 갈증 난 목이 오아시스를 갈망했다. 당장 사 오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있는 인내심 영끌해서 참아냈다. 저 정도는 평소 봐왔던 지극히 평범한 그의 매너 중 하나라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이곳으로 떠나온 이유를 톡 하고 건드려놔서 화창했던 유우시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제 기분과 똑같이 하늘에도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한바탕 쏟아질 거 같아서 유우시는 근처 가게에서 우산을 하나 샀다. 하나 더 사려다가 말았다. 리쿠를 또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산을 사서 나오는데 버블티 가게 앞에서 양손에 음료를 든 채 허망한 표정으로 서있는 리쿠를 발견했다. 에... 꼭 아이 잃어버린 얼굴. 유우시는 울컥 치솟는 마음을 꾹 누르며 소리쳤다.

 

"리쿠!"

 

바로 쳐다보는 눈이 지진 나듯 흔들린다. 제 얼굴과 우산을 빠르게 번갈아 보고 안심한 듯 이내 허물어지는 표정. 눈꼬리가 축 처진 눈이 자신을 알아보고 다시 올라와 휘어지는 과정이 마음을 아프게 콕콕 찌른다. 톡톡. 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우시는 우산을 펼쳐들고 리쿠에게 뛰어갔다. 건네주는 음료 한 잔을 받아들자 빈손이 된 리쿠가 우산을 가져가 든다. 굵어지는 빗방울에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냥 아무 가게나 들어온 건데 마츠야 같은 체인점인 팔방운집이었다. 이런 데는 기본은 한다. 유우시는 제 입맛에 맞았던 메뉴들을 시키고 가게를 휘둘러보고 있는 리쿠를 힐끔 봤다. 아직은 대놓고 쳐다보는 게 어렵다. 얼굴을 살펴보다가 한쪽만 푹 젖은 어깨가 시선을 잡아끈다. 유우시는 제 어깨도 살펴본다. 아침에 입고 나온 그대로 보송하게 잘 마른 옷 상태. 기분이 흐렸다가 맑았다가 엉켰다가 풀렸다가 정돈이 되질 않는다. 왠지 목이 타들어가서 앞에 있는 버블티를 쭉 빨아마셨다. 입안을 적시는 취향 적중한 밀크티 맛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는다.

 

김치 군만두, 새우만두, 완탕면, 마장면. 거하게 한상이 차려졌다. 유우시는 방금 나온 뜨거운 김치 군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역시 여기는 김치 군만두가 최고다. 차례대로 다 맛보고 났는데 김치 군만두 그릇이 어느새 유우시 앞으로 놓여 있었다. 또 맛있어하는 표정 숨기지 못하고 티가 났나 보다. 리쿠와 식당을 가면 젓가락이 자주 닿았던 반찬들이 어느새 제 앞으로 놓여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새였다면 날아갔을 거고, 개였다면 깁스할 정도로 꼬리를 흔들었을 거고, 고양이였다면 배를 까고 누워 냥냥했을거다. 기분이 붕붕 들떠 오른다.

 

밥을 다 먹고 나오자 비는 그쳐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더 습해졌다. 들이마시는 공기에 여전히 비릿한 물 냄새가 섞여 났다. 비 올 때는 딱 붙어있던 두 사람의 거리가 해가 뜨자 다시 한 뼘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유우시는 계속 리쿠를 신경 썼다. 이 더위에 또 힘들어할까 봐. 가던 길에 노점에 들려 부채를 하나 샀다. 슬슬 부채질하며 만들어낸 바람이 유우시를 스치듯 빗겨 리쿠를 향했다.

 

시먼딩 번화가로 들어서 무지개 횡단보도를 건넜다. 때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같이 사진 찍을까 하다가 관뒀다. 다 지나와서 핸드폰을 내밀고 사진 한번 찍어달라는 일본인 관광객을 만나 리쿠가 찍어줬다. 포즈 바꾸고 대형 바꾸고. 꽤 여러 장을 찍어준다. 친절한 마에다 리쿠 씨.

 

그때 유우시의 뒤로 한 덩어리의 관광객 무리가 지나갔다. 에, 나니나니. 아잇, 나니시뗀노. 몸을 억으로 밀어 오는 느낌에 유우시의 몸이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막무가내인 아저씨들한테 떠밀려 인도 밑으로 내려가는 게 싫었던 유우시는 괜한 고집을 부렸다.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다가 한계에 다다른 그때, 등 뒤를 무언가 든든하게 받쳐준다. 익숙한 향수 냄새 때문에 리쿠인지 바로 알았다. 흔들림 없는 안정감에 뒤로 뻗은 손으로 뜨끈한 체온이 닿고 하체가 레고처럼 맞물렸다. 오우야... 공교롭게 리쿠의 수납 방향으로 손이 닿은 유우시는 전기라도 감전된 듯 몸을 파득 떨었다.

 

"리쿠, 저, 저기, 저 카페 들어가자."

 

리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유우시가 앞장서 걸어갔다. 제 남자친구 미니미의 존재감에 우쭐해져 괜히 치솟는 어깨를 잡아내리고, 후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강풍 모드로 부채질했다.

 

카페에 들어온 두 사람은 창가 쪽 긴 테이블에 나란히 착석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는 카페는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밀크티 두 잔을 주문하고 잠시 창밖을 구경하다가 진동벨이 울려 리쿠가 가지고 왔다. 이렇다 할 대화 없이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하면서 밀크티만 축내고 있었더니 금세 반으로 줄었다. 지금은 냉전 상태지만 워낙에 편한 사이라 침묵이 불편하진 않았다. 유우시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카페에서 틀어주는 음악과는 다른 멜로디와 가사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쿠가 몸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지금 부르는 거 누구 노래야?"

"♪......"

"제목이 뭐야?"

"아... 뭘 그렇게 궁금해해?"

 

앗. 방금 말투가 좀 그랬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간 듯 한기가 스쳤다. 대답 대신 질문으로 받아친 유우시가 머쓱하게 웃었는데 리쿠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테이블과 창문 사이를 보고 있던 리쿠는 무념에 가까운 상태였다. 방금 제 귀를 통과한 말이 뇌까지 갈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에, 그럼 너는 궁금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게."

"보통은 이런 거 궁금해하잖아."

"......"

 

아니. 이게 이렇게 이어질 일이 아닌데. 수습하고자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전하려는 뜻은 그게 아닌데 말을 하면 달리 전달될 거 같아서 유우시는 입을 다물었다.

 

"같이 있으면 당연히 궁금하잖아. 우리는 또 사귀는 사이고."

"뭐... 그렇, 그렇지..."

"나는 계속 알고 싶어."

"......"

"나는 계속 궁금해, 유우시가."

 

그런데 리쿠의 말을 듣고 났더니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꽉 조여들었다. 명치께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답답한 건지, 섭섭한 건지. 시원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셔도 꽉 조여든 속이 여전했다.

 

"그런데,"

"......"

"그러면 왜 그랬어...?"

"뭐,를...?"

"아니, 아니... 아..."

"......"

 

지금까지 속에 얹혀있던 말을 꺼내려니까 목덜미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목구멍까지 뻐근하게 조여와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리쿠가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말하고 나서 후회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대화해야 한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침착하게.

 

"리쿠는 나한테 그런 거만 궁금한 거지?"

"에?"

 

리쿠의 표정이 흐리멍덩해진다. 그 얼굴에 살짝 긁힌 유우시가 말했다.

 

"우리가 하루 중에 제일 많이 하는 대화가 뭔지 알아?"

"......"

"밥 먹었어? 밥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그거느은, 나한테 제일 중요한 질문인데."

 

순간 똘망해져 받아치는 리쿠한테 두 번째로 긁힌 유우시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아, 미안. 일단 말해, 다 들을게. 곧바로 어르는 목소리에 유우시가 재차 숨을 골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으면 했고, 그로 인해 우스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 너랑 결혼하는 거지?"

 

당연한 질문을 받았는데 유우시의 어조가 약간 시비조라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못한 리쿠는 눈만 살짝 크게 떴다.

 

"결혼하자면서. 나랑 결혼하자면서. 날짜, 시간만 같이 정하고. 장소는 어디서? 우리 어디서 결혼식 올려? 혹시 집인가?"

"......"

"사는 집은, 지금 우리 집에서 살자면서. 넌 지금 누구랑 살아갈 집을 고치고 있는 거야?"

"그걸 어떻게..."

 

리쿠의 말에 속이 시끄러워진다. 밀물처럼 밀려든 복잡한 감정이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랐다. 소란해진 마음도 어쩐지 서러워졌다.

 

"나 몰래 통화하는 거 다 들었어. 엿들은 건 아니야. 들려서 들었는데, 내가 들어가니까 너 전화 딱 끊었어."

"......"

"우리가 결혼하는 거잖아. 지금 사는 집 가전제품들 바꿀 거면 나도 같이 골라야지. 근데 너 누구랑 결혼하길래, 검은색으로 하자, 흰색으로 하자. 그걸 왜 다른 사람이랑 결정하고 있어? 다시 물어보는데, 너 나랑 결혼하는 거 맞지? 나는 전부 회색으로 할 거야!"

"하... 그게,"

"아직 안 끝났어."

"... 응, 계속 말해."

 

리쿠의 얼굴에서 고구마 100개, 노른자 100개 먹은 거 같은 답답함이 읽혔다. 쟤 지금 체했네. 근데 내가 더 답답해. 이제 사이다 마실 타이밍이야.

 

"결혼 결정되고 너랑 내가 대화한 거라곤 잘 잤어, 못 잤어, 식사 메뉴, 배고파, 안 고파. 피곤해, 안 피곤해. 오늘 팬티 입었어, 안 입었어, 이런 얘기뿐이고. 퇴근하고 와서도 언제부턴가 나한테 일 얘기는 하나도 안 해. 나한테 말해봤자 못 알아들어서 그래? 그래도 너 매일 조잘조잘 떠들어댔어. 그러면 내가 조언해 줄 때도 있었고... 근데 이제는 나한테 아무 기대도 없는 거야. 나한테 뭘 바라는게 없어. 이거 얼마나 슬픈 건지, 너 모르지."

"......"

"전화 오면 나 있는데서 안 받고 밖에 쪼르르 나가서 받고!"

"......"

"내가 이 말까지는 진짜 속상하고 자존심 상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

"......"

"너 혹시... 결혼 앞두고 바람피워? 남자들 거의 그런다더라. 결혼 날짜 정해지면 싱숭생숭해져서 그럴 수도 있대. 근데 나도 남자지만 난 그런 생각 전혀 안 들었거든. 네가 모르는 사람이랑, 네가 몰라야 할 대화나 전화 같은 거 절대 안 했거든."

 

카페 음악 볼륨이 작아진 거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네. 팬티 소리 너무 컸던 거 같은데. 그래도 목소리가 솔은 안 넘었다. 목소리 안 떨었고, 박자 안 절었고, 대사도 안 씹었어. 잘했어, 유우시. 네가 해냈어. 네가 이겼어.

 

"할 얘기... 다 끝난 거야?"

"일단은."

"그럼 나가서. 호텔 가서, 네 방이든 내 방이든 거기 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표정이 사라진 리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유우시도 리쿠가 작정하고 표정을 감추면 지금 어떤 상태이고, 기분이 어떤지 알아내기 쉽지 않다. 카페를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기까지 리쿠의 얼굴에 표정이랄 게 없었다.

 

말하고 났더니 속은 후련한데,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것도 같고. 다툴 때 한 번씩 끊어가는 순간을 갖는데 지금이 그때인 거 같다. 들끓었던 감정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아 갔다.

 

***

 

리쿠는 갈아입을 옷만 챙겨서 유우시가 머물고 있는 룸으로 왔다. 유우시가 먼저 씻는 사이 리쿠는 방을 둘러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 저 답답한 속을 지금까지 어떻게 끌어안고 있었을까. 깊게 대화하지 않으면 이런 사달이 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오래 만났고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를 모를 때가 있다. 진지한 대화 백날 나눠봤자 찰나에 쌓인 오해가 큰따옴표 붙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에야 상대방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넘겨짚은 생각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순간 그대로 자랄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거, 여전히 어렵구나. 10년 동안 사랑을 연구했어도 우리는 아직도 서툴고 미숙하다고 생각한다.

 

꽤 오래 씻고 나온 유우시의 얼굴이 말갛고 뽀얗다. 뜨거운 물에 붉어진 얼굴을 보고 자연히 당기는 아랫배를 무시하고 이번엔 리쿠가 씻으러 들어갔다. 유우시가 했던 말 중에 가슴에 아프게 박힌 말들은 모두 뽑아내 물에 흘려보냈다. 다 오해해서 하는 말이니까. 진심 아닌 거 다 아니까. 그래도 바람피웠냐는 소리는 개중에 제일 깊이 박혀서 빼낼 때 무지 아팠다. 아픈데도 웃음이 나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 사이 아직도 뜨겁네. 텐션 늘어진 거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바짝 당기는 유우시한테 또 반하고 말았다. 매력 미쳤어. 이러니 너랑 꼭 결혼해야지 안되겠다.

 

씻고 나온 리쿠는 침대에 누워있는 유우시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자는 척이 아니고 이번엔 진짜 잠들었다. 고른 숨이 퍼지고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몸이 꽤 깊이 잠든 거 같았다. 새근새근 숨만 쉬고 있는데도 예뻐죽겠다. 여느 커플처럼 다투긴 해도 서로가 완식이라 얼굴만 보면 화가 풀려서 꽁한 게 오래가지 못했다.

 

그랬는데. 아까 조곤조곤 말하던 유우시를 생각하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속에 있는 건 다 털어낸 건가. 편해진 인상에 마음이 놓인다. 리쿠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면서 방안의 모든 빛을 소등했다. 침대 옆 스탠드 조명만 은은하게 켜두고 유우시의 옆으로 가서 누웠다.

 

"다... 씻었어...?"

"에, 깼어?"

 

조심한다고 했는데 유우시가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 묻은 눈을 비비면서 하품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빤히 보고 있다가 이마에 살짝 입 맞췄다. 조명에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반쯤 커진 눈이 마주친다.

 

"키스... 해도 돼?"

"......"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사랑스러워 죽겠다. 리쿠는 유우시의 어깨와 목을 잡고 몸을 끌어안았다. 가볍게 딸려오는 몸을 품속에 가득 안고 입술을 살짝 물었다. 오랜만에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섞인다. 바깥의 날씨처럼 맞붙는 입술이 온통 물기로 젖어 습해진다. 살짝 빨아당긴 입술을 혀끝으로 핥다가 그 사이를 파고들어 갔다. 촉촉한 점막을 혀로 쓸면서 안쪽에 숨은 혀를 건드렸다. 익숙하게 감겨드는 뜨거움. 숨소리가 짙어졌다. 혀를 살살 쓸어주고 빠져나와 입술을 입에 물고 은근히 압박하며 빨아당기자 기분 좋은지 듣기 좋은 신음을 흘린다. 닭 모가지처럼 가느다란 목을 쓸다가 두근거리는 맥박을 느낀 리쿠는 서서히 제 입술을 물렸다.

 

"유우시..."

"......"

"말하지 못해서 미안. 너한테 비밀 만들어서 미안해."

"......"

 

키스로 몽롱해진 유우시의 눈빛이 또렷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 생각 들게 해서 미안해. 천천히 깜박이는 눈을 쳐다보며 리쿠는 할 말을 정리했다. 긴 호흡이 필요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프러포즈가 조금...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준비가 미흡했던 거 같아서... 그래서 결혼식 장소는 좀 더 멋진 곳으로 하고 싶어서 알아보는 중이었어. 3군데 골랐는데, 같이 가서 보고 네 맘에 드는 곳으로 결정하면 좋을 거 같은데... 3군데 다 마음에 안 들면 같이 둘러보고 네가 하고 싶은 데서 하자."

"... 집은, 집은 뭐야?"

"집도 결혼 선물이었는데, 세상에 비밀이 없네... 또 망했다. 헤헤."

 

웃음으로 분위기를 연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아직은 시원찮은 것 같다. 바로 웃음을 지워낸 리쿠가 말했다.

 

"네가 주택에 살아보고 싶다고 했던 거 생각나서 집 알아보고. 그러다 마침 좋은 집을 구했는데 수리가 필요한 거 같아서 고치는 중이었어. 인테리어 해주는 형님이 오래 살집이면 무난한 기본색이 좋다고 해서 결정하는 와중에 그 통화 내용을 네가 들었던 거 같고... 회색이 좋으면 그렇게 바꾸자. 나는 뭐든 좋아."

"......"

"최대한 네 신경 안 쓰이게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결과적으론 더 신경 쓰게 만들었네..."

 

제일 커다란 의문들이 풀렸는지 표정이 온화해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리쿠만 알아챌 수 있는 표정 변화였다. 살짝 내리 깔렸던 눈이 다시 위로 올라와 마주친다. 왠지 째려보는 거 같은데 독기 빠진 눈이라 순둥이 그 자체다.

 

"... 그런 거면 그냥 얘기해 주지."

"그러게, 그럴걸 그랬다. 그리고..."

"......"

"나 회사 관뒀어."

"에?!"

 

두 배나 커져서 똥그래진 눈이 말도 못 하게 귀엽다. 순간 볼을 콕 찌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타고난 귀여움에 재능까지 더해져서 이렇듯 의도치 않게 뽐낼 때마다 참지를 못하겠다. 아직 완벽하게 매듭이 풀리지 않아 맘껏 귀여워해 주지 못하는 게 아쉽다. 이따가 많이 귀여워해 줘야지.

 

"너랑 신혼여행 여기저기 오래가고 싶어서 회사 관뒀고. 그러고 나서 우리 함께 살 새집 인테리어 공사 지켜보느라 거기 왔다 갔다 했어. 전부 미리 말하지 못한 거, 정말 정말 미안해."

"... 아니이... 그런 결정을 나랑 의논해야지."

"......"

"이걸, 이렇게. 이제서야... 나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 물론, 싫은 건 아니야. 근데 이게 뭐라고. 미리 말해줬으면 그냥 다 좋았을 얘기였잖아."

 

서프라이즈 이벤트라는 올가미에 걸려 어떻게든 해내고 싶었던 남자는 코끝이 매콤해졌다. 너 한번 감동시키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진짜 오버 쩔었다. 유우시는 모든 오해가 풀렸지만, 진작 말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들 때문에 자기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어이없는 눈치였다.

 

"티를 적당히 내던가... 전화 오니까 바로 쪼르르 나가서 받고... 너는 연기하지 마. 재능 없어."

 

리쿠는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제가 감춰온 비밀을 하나씩 곱씹으며 새롭게 혼을 내고 있는 유우시를 그저 달래주기 바빴다. 어, 연기 안 할게. 내가 다 잘못했어. 이 정도면 악성 민원도 아니니까. 집은 어디냐, 얼마큼 꾸몄냐, 가구는 어떤 거, 가전은 어떤 거. 집에 벽지와 타일들 색만 결정했고, 가구랑 가전은 아직 안 골랐다는 말에 유우시의 댓발 나왔던 입술이 살짝 들어갔다. 하나씩 입력되는 컴플레인을 처리하며 리쿠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는 이렇게 숨기는 거 없이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되는 사람인데, 혼자 떠맡은 비밀 임무를 다 티 나게 수행하면서 나댄 거 같아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일본 돌아가면 다 가볼 거야."

"그래, 그..."

 

에? 돌아간다고?

 

"가전이랑 가구들 전부 내가 다 고를 거야."

"응! 그래, 그래!!! 하나씩, 같이 골라서 우리 집에 채워 넣자."

"신혼여행지는 결정 안된 거지?"

"어어,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너도 가고 싶은 곳 말해. 같이 골라."

"응응!!!"

 

유우시는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이야 답을 모를때나 하는 거고. 다 알고 난 얼굴이 편하게 풀어져 씹천사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방긋 웃는 얼굴에 소름이 돋아났다. 리쿠는 이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너무 예쁘게 웃는 얼굴에 못 참고 뽀뽀하자 깜짝 놀란 얼굴이 다시 부힛거린다.

 

한참 웃던 유우시가 베개 속으로 손을 넣고 꼼지락거린다. 뭘 찾는 건가 싶어서 빤히 보던 리쿠의 눈이 점점 커졌다.

 

"다시 껴줘."

 

유우시의 손에 프러포즈 할 때 껴줬던 반지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이걸 챙겨왔었어...? 빨리 껴달라는 듯 손을 까닥여서 리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를 빼고 한참 보다가 유우시의 약지에 반지를 껴주었다.

 

"리쿠, 결혼해 줘서 고마워."

"......"

"나 데리고 살아줘서 고마워."

"......"

"고생 같은 거 안 시킬 거란 다짐도 못하고, 손에 물도 네가 더 많이 묻히게 될 거고, 힘도 네가 더 많이 쓰게 될 테지만. 그리고 나 때문에 화낼 일도 또 생겨날 테지만. 그래도 나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

"우리 대화 많이 하자. 이런 오해 더는 생기지 않게. 싸워도 금방 풀고 화해하자. 알았지?"

"......"

"나도 더 많이 사랑해 줄게. 사랑해, 리쿠."

 

아 왜 이래... 왜 또 나를 울려. 반지에 뽀뽀를 날리며 팔을 벌리고 안아달라 조르는 유우시를 품에 안으며 리쿠는 또 울었다. 울고 웃다가 못다 한 얘기도 마저 하고, 몸의 대화도 하고 그랬다. 완벽하게 짜 맞춰진 몸을 풀어주고 들어가려는데 미리 풀어뒀다는 말에 성난 몸을 막무가내로 밀어 넣었다. 나를 너무 잘 다루는 사람. 그냥 휘둘리는 게 속 편하다.

 

"나는 너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지."

"뻥치지 마. 보고 싶었다면서 연락도 안 하고..."

"난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걸 봤어."

 

뭔 소리인가 싶던 리쿠의 눈이 유우시가 내민 핸드폰으로 고정됐다. 화면으로 낯익은 집이 보인다. 에...? 이거 우리 집인데. 다만 구도가 꼭 몰카 구도 같았다. 거실, 침실, 서재. 주로 리쿠가 많이 머무는 곳들이었다. 그리고 다이닝룸과 드레스룸에도 카메라가 있었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나는 너 못 보면 진짜 병나."

"......"

"그래서 떠나기 전에 여기저기 카메라 설치해두고 왔지요~!"

 

킥킥거리는 유우시의 얼굴 봤다가 핸드폰을 봤다가. 좆 빠지게 뛰는 마에다 리쿠 위에 훨훨 날아다니는 토쿠노 유우시가 있었다. 내내 지켜보고 있다가 죽어갈 때쯤 누나를 보냈다는 것을 깨닫자 속으로 티라노사우르스 고함을 내질렀다. 아 진짜아!!!

 

개빡친 리쿠는 밤새도록 유우시의 엉덩이를 괴롭히는 형벌을 내렸다. 나 죽네, 나 죽어. 곡소리를 내도 찰박거리는 소리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

 

시먼딩 행복당 버블티의 알바생 얼굴이 무참히 찌그러진다. 그놈이다. 생긴 건 멀쩡하면서 하는 짓은 개진상. 어떻게 아는지 매번 궁금은 한데 물어본 적은 없다. 처음엔 잘 생기고 귀엽기까지 한 외모에 설레서 잘 대해줬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말 한번 물리면 그날 하루가 피곤해진다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안다. 귀신같이 안 바쁜 타이밍에 딱 맞춰 나타나 올 때마다 주문 스무 고개하는 미친놈.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옆에 혹이 달려 있다.

"흑당 버블티 두 잔이요."

 

미친놈과 눈 마주칠까 봐 주문을 받은 즉시 계산을 시도했다. 달려온 혹이 바로 현금을 내밀었다. 저 미친놈은 돈도 그냥 안 줘서 내돈내산 터키 아이스크림 먹을 때나 느끼던 바짝 약 오르는 기분을 느끼곤 했었는데. 이 더위에 팔짱을 끼며 어깨를 잡고 부빗거리는 미친놈의 머리를 달려온 혹이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준다. 두 사람의 손에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곳은 대만.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게이 커플의 커퀴짓에 알바생의 얼굴이 심드렁해진다.

 

뭐, 둘이 잘 어울리긴 하네.

 

***

 

일본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새로 살 집부터 둘러보고 결혼식장 투어를 했다. 리쿠가 골라둔 3군데 중에 한곳으로 결혼식장이 결정됐다. 유우시의 마음에 드는 곳이 후보 중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 달이면 드디어 결혼한다. 이제 1막이 내리고, 2막이 시작된다. 여기까지 오는데 인터미션 한번 빡세게 쉬어갔지만, 도착한 끝의 행복이 치사량을 초과했다. 행복해서 죽을 거 같다.

 

사이즈만 다른 반지를 나눠낀 손이 엉켜든다. 손가락 사이로 각자의 손이 얽히고 깍지를 낀다. 죽을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을 손을 흔들며 걷는 걸음이 동일한 보폭과 속도로 맞춰진다. 새롭게 시작될 2막도 결말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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