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즈코쿠요우
의정
上
새벽 다섯 시의 법당은 에어컨 튼 방보다 훨씬 시원했다. 리쿠는 떡두꺼비를 닮은 보살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극락왕생 같은 거창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마룻바닥의 한기가 좋아 꾸역꾸역 몸을 일으킨 결과가 고작 여기였다.
"미리 좀 해둘걸......."
텅 빈 법당에서 리쿠가 툴툴거렸다. 주지 스님이 오늘까지 끝내라며 던져준 위패만 마흔 개가 넘었다. 오늘도 잠은 학교에서나 자게 생겼다. 리쿠는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차가운 마룻바닥의 한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일찍 일어나는 건 죽을 맛이지만 막상 깨고 나면 하루가 빳빳하게 펴지는 기분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오늘따라 적어야 할 이름들은 죄다 획이 많았다. 다 살지도 못하고 간 사람들이 이름은 왜 이렇게 길게 지어서 사람을 고생시키는 걸까. 이름 획수 따위로 삶과 죽음이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절밥 먹고 살다 보면 이런 사소한 것에도 괜히 의미를 두게 된다. 불교에선 모든 것을 깨닫고 해탈하면 부처가 되어 다시는 생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한다. 리쿠는 제 이번 생이 몇 번째인지는 몰라도 분명 처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세는 나이로 여섯 살,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유독 선명한 탓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아침이 올 때까지 절 문 앞에 서 있던 풍경. 삶의 어떤 장면들은 박제된 것처럼 잊히지 않는다.
보통 사찰은 주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곤 한다. 하지만 청공사 주지 스님의 아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리쿠가 이 절 앞에 나타난 건 그로부터 일 년 뒤였다. 앞서 말했듯 무언가를 믿는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우연조차 운명으로 포장하기 마련이다. 주지 스님은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며 리쿠를 집 나간 아들의 빈자리에 끼워 넣었다. 리쿠는 붓 끝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대타면 어떻고 하늘의 뜻이면 또 어떤가. 일단은 이 마흔 개의 이름부터 해치우는 게 먼저였다.
스물세 번째 위패가 완성됐을 때, 리쿠의 손목시계는 이미 여덟 시를 향하고 있었다. 집중이 풀리자마자 오래 눌려 있던 왼쪽 다리에서 쥐가 일었다. 리쿠는 당황하지 않고 골반에 힘을 준 채 왼쪽 발가락을 까닥였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절 백팔 번을 예사로 넘기는 리쿠에게 이 정도쯤은 일도 아니었다. 리쿠는 완성된 위패와 남은 것들을 바구니에 나누어 담고 주섬주섬 일어났다. 쥐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무 바닥을 딛는 발바닥의 감각이 묘하게 들떠 있었다.
법당 문을 열고 나오자 치넨이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치넨은 리쿠와 또래인 동자승이었다. 사실 체구가 비슷해 다들 또래려니 짐작할 뿐, 청공사의 누구도 치넨의 제대로 된 나이를 알지 못했다. 손에 쥔 검은 비닐봉지 틈으로 시금치 줄기가 삐죽하게 솟아 있었다. 오늘 식단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시금치 비빔밥으로 통일인 모양이었다.
"리쿠! 아침 먹고 가!"
들려오는 외침에 리쿠는 대답 대신 손만 대충 휘저었다. 너나 많이 먹으라는 뜻이었다. 리쿠는 학교 매점에 진열된 야키소바 빵과 딸기 밀크 샌드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낡은 고무신을 휙 벗어 던지고는 신발장에서 나이키 맥스 95를 꺼냈다. 출시되자마자 어렵게 구한 놈이었다. 신은 지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흠집 하나 없이 반짝거렸다. 리쿠가 제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보물 1호기도 하다.
반팔 와이셔츠에 맥스 95, 회색 교복 바지. 빡빡이 치넨과 달리 목 근방까지 흐르는 검은 머리.
리쿠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청공사의 스님들이 모여 리쿠의 머리를 밀어버리려 한 적이 있다. 그때 리쿠는 바리캉을 든 손을 물어뜯으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 소동을 지켜보던 주지 스님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리쿠를 붙들고 있던 손들이 떨어져 나갔다. 대신 성인이 되면 예외 없이 삭발시키겠다는 엄포가 뒤따랐다. 저런 고집불통이 청공사에 흘러든 것조차 부처의 뜻이라며 주지 스님은 깎다 만 리쿠의 머리칼을 보며 체념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가 증명한다.
리쿠는 종교에 아무 뜻이 없다.
치넨의 매끈한 머리통이 가끔 귀여워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게 제 미래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도 전부 관심 밖이었다. 대충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다음 생에 고양이로 태어나도 딱히 상관없었다. 다만 이번 생의 목표는 확실했다. 학교 사람들에게 자신이 절간에 처박혀 위패나 깎으며 사는 처지라는 걸 들키지 않는 것. 살갗에 배어버린 지독한 향 냄새나 매일 새벽을 깨우는 목탁 소리 같은 것들.
"리쿠. 벌써 학교 가니? 본존불께 아침 인사는 드리고 가야지."
주지 스님의 목소리가 등 뒤를 잡았다. 리쿠는 제 몸에 달라붙은 사찰의 흔적들을 털어내며 얼른 청공사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히가시야마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뒷모습이었다.
*
골목 하나를 더 지나자 슬슬 학교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쿠는 얼른 제 와이셔츠 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고기 누린내보다 지독한 게 절 냄새다. 흙먼지, 풀 비린내, 그리고 마른 나물 냄새.
그때 뒤에서 긴 팔 하나가 리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타하시 나루토였다. 한자로 쓰면 歌橋 鳴門 이렇게 쓴다. 획수도 많고 대각선도 많아 위패에 쓰기에는 최악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부르기엔 더없이 쉬웠다. 히가시야마 고등학교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만화 주인공과 이름이 같았으니까.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 중인 이 만화는 리쿠 또래들 사이에서 종교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만화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나루토는 그 이름만큼이나 요란하게 빛났다. 타고난 스타성이 있었고, 서열 정리로 학교라는 생태계를 장악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하다. 자신의 위압감을 증명하면 된다. 위압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만만한 대상을 골라 짓밟으면 됐다.
"방금 피했냐?"
마에다 리쿠가 쉬는 시간마다 교실 구석에서 인간 샌드백이 된 배경에는 그런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여학생 몇 명은 담임에게라도 말해 보라며 참견 섞인 걱정을 건넸다. 남의 일이기에 가능한 조언이었다. 보호자라도 소환되는 날엔 학교 생활은 지금보다 더 우스워질 게 뻔했다. 법복을 입은 빡빡이 스님이 교무실을 들락거리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리쿠를 진저리치게 했다. 차라리 몇 대 맞고 마는 게 낫다는 게 리쿠의 결론이었다. 매점에서 공수해 온 빵과 샌드를 뺏길 때면, 책상이라도 엎어 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담임에게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거였다. 히가시야마 고등학교 교사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유독 강했다. 교토 교육위원회로부터 3년 연속 평화 우수교 표창을 받은 이력은 그들에게 훌륭한 훈장이었다. 어른들은 순진한 걸까 아니면 무책임한 걸까? 성격도 체급도 제각각인 아이들 수백 명을 좁은 교실에 몰아넣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오만이다. 폭력이 없었다는 통계는 결국 폭력을 아주 잘 은폐했다는 말과 같았다.
하나의 교실에서 약자가 되는 데 거창한 서사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운이 나쁘면 그렇게 된다. 2학년 C반에서 리쿠가 이런 위치에 놓일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쿠는 잘생긴 외모에 적당히 호감을 사는 인상이었고, 맥스 95를 신었으며, 교복 바지 통도 적당히 수선할 줄 아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됐다. 정말이지 그건 이유가 끼어들 틈 없는 일이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인간은 본래 성무선악하나 어리석어서 갖은 욕망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건 꽤나 불교적인 고찰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고찰조차 학교 선생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2학년 C반 담임인 모리키미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는 일본의 모든 정수가 교토에서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는 부류였다. 학생들은 그런 모리키미를 보수 꼰대쯤으로 여겼지만, 정치적 성향이 어떻든 확실한 건 하나였다. 모리키미는 마에다 리쿠라는 남고생 하나 때문에 교토부와 히가시야마 고등학교의 평판에 금이 가는 상황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렇게 나루토의 팔에 어깨가 붙잡힌 채 정문을 지나는데, 웬 애 하나가 멀뚱히 서서 학교 비석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명찰을 보니 같은 2학년인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정도로 잘 빠진 얼굴이면 리쿠가 모를 리 없는데. 나루토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 애의 옆얼굴을 슬쩍 훑었다.
"야. 쟤가 낫냐, 내가 낫냐?"
나루토가 손등으로 리쿠의 뺨을 툭툭 치며 물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평소 옳은 말만 하고 살았다면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거다. 리쿠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나루토를 가리켰다.
"그렇지, 그렇지."
그제야 목을 옥죄던 끈적한 팔이 떨어져 나갔다. 나루토가 앞서 달려가자, 비석만 보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리쿠를 보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창백할 만큼 하얀 얼굴, 그리고 날렵한 턱선. 방금의 꼴사나운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쿠는 서둘러 가방끈을 고쳐 쥐고 교문을 통과했다.
도쿄에서 전학 온 토쿠노 유우시였다.
자리에 앉고 십 분쯤 지났을 때 모리키미 선생은 그 애를 그렇게 소개했다. 뒤이어 긴 설명이 덧붙여진 듯했으나 리쿠의 기억에는 남지 않았다.
유우시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리쿠는 한눈에 알아봤다. 도쿄에서 왔다는 말에 아이들은 잠시 눈치를 살피는 듯했지만, 며칠만 지나면 유우시 역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될 게 뻔했다. 리쿠는 유우시의 예정된 미래가 안쓰러웠다. 리쿠는 타고나길 단단했다. 웬만큼 밟혀도 와이셔츠만 더러워질 뿐 통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피부가 원체 어두워 멍자국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쯤 개울가에서 돌이나 줍고 있을 치넨을 생각하면 차라리 밟히는 이쪽이 낫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우시는 달랐다. 보기만 해도 유약했다. 스치기만 해도 금세 멍이 들 것 같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이 리쿠를 자꾸만 건드렸다.
그러나 한 반에 두 명의 약자는 필요 없었던 걸까? 리쿠가 왜 괴롭힘을 당하는지 알 수 없듯,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유우시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나루토 패거리는 유우시에게 다가와 점심시간 축구 한 판을 제안했다. 심지어 유우시는 축구마저 잘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땀을 흘리며 들어오는 아이들은 유우시를 이나모토라 불렀다. 이나모토 준이치는 나루토가 가장 아끼는 축구 선수였으니, 그건 그들 세계에서 최상급의 찬사였다. 또 유우시는 눈치도 빨랐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과 복도를 돌아다니며 학교 구석구석을 구경했지만, 생태계 최하층에 있는 리쿠에게만큼은 일절 관심이 없었다.
3교시가 끝날 무렵, 나루토의 오른팔인 텐무가 리쿠의 머리 위에 페트병을 올렸다. 직전 한문 시간 숙제를 안 해왔다는 이유로 망신을 당한 터라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그 역할엔 역시 리쿠가 제격이었다. 텐무는 리쿠를 교실 맨 끝에 세워두고는 한신 타이거스 선발 투수라도 된 양 오버스러운 폼을 잡았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다리를 높게 쳐들며 리쿠의 머리를 겨냥했다.
첫 번째 투구. 공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리쿠를 비껴가 사물함에 쾅 소리 내며 박혔다. 거대한 소음에 여학생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무식해서 여자나 제대로 만나겠냐던 한문 선생의 독설이 텐무를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었다. 웬만한 자극엔 반응 없던 리쿠조차 몸을 움츠렸다. 리쿠가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자 텐무는 그제야 흥이 돋았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두 번째 투구. 야구공이 리쿠의 허벅지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빡 소리와 함께 공이 튕겨 나갔다. 탄탄한 야구공에 열여덟 남고생의 전력이 실리자 고통은 상상 초월이었다. 리쿠가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여학생들은 질린 눈으로 텐무를 바라봤고, 남학생들은 제구력 죽이는데! 라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텐무는 한술 더 떠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에게 공을 주워오라고 턱짓했다. 여기서 또 던지겠다고? 내일 당장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게 아니라면 무리한 처사였다. 그 꼴을 보던 나루토는 어이, 적당히 해, 라고 말하면서도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텐무는 페트병만 쓰러뜨리면 진짜 그만하겠다며 우쭐거렸다. 제대로 맞으면 페트병이겠지만, 조금만 빗나가도 공은 리쿠의 얼굴에 꽂힌다.
이거 진짜 제대로 맞으면 죽겠는데. 리쿠는 웃으며 먼지 묻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딱히 머리 쓸 줄 몰랐다. 그저 운이 좋아 공이 페트병을 맞히거나, 아까처럼 허벅지나 옆구리 같은 데나 때리고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얼굴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디 하나 골절되는 게 나았다. 텐무는 손가락으로 마름모꼴을 만들어 리쿠의 얼굴을 조준하듯 콕 집었다. 그러고는 다시 후욱, 숨을 내뱉으며 기지개를 쫙 폈다. 감이 좋지 않았다. 이쯤 복도를 지나가는 선생님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텐무가 공을 뿌렸다. 전력투구였다.
그때. 공보다 빠르게 리쿠의 시야 안으로 하얀 손 하나가 침범했다.
"에? 너 뭐야?"
토쿠노 유우시였다.
저걸 잡는다고?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정말 전력이었는지 공을 낚아챈 유우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유우시가 공을 가볍게 잡아내자 지켜보던 여학생들 사이에서 멋있어!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장난이 좀 심한 것 같아서."
유우시가 야구공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유우시의 회색 교복 바지 주머니가 볼록하게 솟았다.
"이러면 꼭 괴롭히는 것 같잖아."
유우시의 말에 나루토 패거리는 쟤 지금 뭐라는 거야? 하는 표정을 지었고,
리쿠는 기분이 제대로 잡쳤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과 타인의 입을 통해 괴롭힘당하는 아이라 불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리쿠는 여태껏 수없이 무릎 꿇려지면서도 신발만큼은 지켜냈다. 뺨을 맞아 고개가 돌아가면서도 기어이 중심을 잡아냈다. 괴롭히는 패거리들만 자리에 없으면 평범한 애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리쿠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리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주는 아이였으니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불쌍해 보인 적 없었으니까. 절에 살지만 절간 아이로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리쿠는 자리로 돌아가 책상에 걸어둔 가방과 MD 플레이어를 챙겨 교실 밖으로 나섰다. 발가락 끝에 힘을 주고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성큼성큼 걸었다. 남은 수업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얼른 이 학교 밖으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
리쿠는 평상에 걸터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치넨 옆에 앉아 초발심자경문이나 천수경을 미친듯이 외우면 몇 살쯤 사미가 될 수 있을까. 청공사 스님 중 그 누구도 리쿠에게 학교에 가라 등 떠밀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도를 닦겠다고 하면 아마 두 팔 벌려 환영할 터였다.
불교에는 苦, 즉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생각보다 불교는 맞는 말을 자주 하는 종교이다. 인생은 정말이지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데 옆으로 주지 스님이 다가왔다. 리쿠는 얼른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가렸다. 야구공에 강타당한 자리가 벌겋게 부풀어 올라 피멍이 들고 있었다. 반바지로는 차마 가릴 수 없는 위치였다.
"오늘은 학교에 안 가냐?"
"개교기념일이에요."
"그럼 가서 울력이라도 돕지 않고. 또 고양이 구경이나 하고 있었구나."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리쿠의 말에 주지 스님이 웃었다.
"생각?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길래."
"...왜 태어났을까 그런 생각요."
방금 건 리쿠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스스로 뱉고도 아차 싶어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지 스님이 리쿠의 옆자리로 몸을 붙여 앉았다. 해묵은 나무 평상이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삐그덕거렸다.
"리쿠야."
평온한 목소리였다.
"네...."
"제 의지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 저마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어 세상에 나온 게지."
잔소리 시작이다. 리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고 눈으로 발치에서 길 잃은 개미 한 마리를 쫓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네가 청공사에 흘러든 것도, 수려한 얼굴로 태어난 것도, 오늘처럼 사찰 뒤에 있는 길고양이를 살피는 마음도, 세상에 나온 것과 나오지 못한 것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태어나지 못한 것도요?"
리쿠의 물음에 주지 스님은 대답 대신 마당 한쪽으로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끼 낀 돌지장보살들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서 있었다.
"그렇고말고. 빛을 보지 못한 채 누그러지는 인연이 얼마나 많더냐. 제 몫보다 과하게 머물다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 몫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가는 이도 있는 것이지."
돌지장보살의 머리 위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부서졌다. 리쿠는 그 무거운 침묵이 싫어 애먼 개미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살다 보면 말이다. 왜 그 많은 사람 중 하필 나일까, 억울해서 잠 못 이루는 날이 올 게다."
리쿠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그래도 그냥 들었다. 주지 스님은 입을 다문 리쿠를 잠시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너에게 그런 순간이 온다면 어떡할 테냐?"
"…그냥 끝까지 억울해할 것 같은데요."
리쿠의 군더더기 없는 대답에 스님이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우리 리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지.
"하지만 리쿠야."
"......."
"그 모든 걸 우리는 필연이라 부른단다. 네가 알지도 못하는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오직 너만을 향해 달려오고 있던 운명 같은 것 말이다."
필연.
리쿠는 낯선 단어를 입안에서 가만히 굴려 보았다. 정체 모를 곳에서부터 나를 찾아 달려오는 운명이라. 본래라면 소름 끼쳐야 마땅할 소리인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내게 닥친 이름 모를 불행들이 적어도 내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면죄부를 받는 것 같아서.
주지 스님이 리쿠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먼저 가는 것도 인연이고, 남겨지는 것도 다 인연인 법이다. 먼저 떠난 인연이 남겨진 이를 지키기도 하고, 남겨진 이가 떠난 이의 몫까지 대신 살아가기도 하는 게 삶이지."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 아니겠니.
주지 스님이 몸을 일으키자, 가라앉아 있던 낡은 평상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허벅지 멍에는 얼른 약이나 발라라."
금방이라도 단골 고양이 나비가 나타나 리쿠의 종아리에 보드라운 볼살을 비빌 것 같은 지독하고도 고요한 오후였다.
*
사흘간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절방에 처박혀 지겨운 나물 냄새만 맡다 보니, 삭발한 스님으로 늙어 죽느니 차라리 학교에서 샌드백으로 사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반에 두 명의 약자는 필요치 않다 하지 않았나. 리쿠가 자리를 비운 사이 2학년 C반의 타깃은 다시 공석이 되었고,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유우시에게 돌아갔다. 유우시 또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될 거라던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비릿한 우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남자애들이 유우시의 머리에 다 마신 우유 곽을 던지고 있었다. 내용물은 비었을지 몰라도 곽 틈새로 허연 우유 방울이 비어져 나와 유우시의 머리칼을 적셨다. 리쿠는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런 리쿠를 발견한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이번에는 리쿠 상이 유우시를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리쿠는 대꾸 대신 노트를 펼쳤다. 그러고는 읊조리며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흐른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흐른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흐른다. 그렇다면 리쿠가 이지메를 당한 것도, 유우시가 도쿄에서 교토까지 흘러 들어온 것도, 지금 리쿠 대신 우유 곽을 맞는 것도 모두 정해진 순리라는 뜻이다. 주지 스님이 무엇을 그리 어렵게 은유했는지는 몰라도, 열여덟 리쿠가 할 수 있는 생각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문득 리쿠는 노트 위에 적던 문장을 거칠게 그어버렸다. 검은 잉크에 짓눌려 글씨가 형체를 잃었다. 만약 이 모든 소란이 아주 오래전부터 겹겹이 쌓여온 필연이라면. 지금 이 선택 또한 먼 미래를 뒤바꿀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그 결실이 수십 년 후일지, 혹은 리쿠가 먼지가 된 수백 년 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주지 스님의 말이 맞다면, 우유 비린내가 진동하는 이 순간이 고리를 뒤트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리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유우시를 둘러싼 남자애 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올려 둘의 머리를 후려쳤다. 철제 프레임 쪽으로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힘이었다. 다행히 나무 좌석 쪽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그대로 고꾸라져 병원으로 실려 가야 했다. 리쿠의 뺨 어귀에 붉은 피 몇 방울이 튀었다. 난리난 아이들 사이로 유우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일로 리쿠에게 생긴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새벽 예불 전후로 법당 바닥 걸레질, 그리고 매일 저녁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구하는 참회문 필사가 한 달간의 일과가 되었다.
(2) 학교에서는 한 달간의 출석 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3) 대신 교내외에서 80시간의 봉사 활동을 채워야 했다.
놀랍게도 이외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출석 정지는 벌이라기보다 포상에 가까웠다. 나루토 패거리의 보복을 내심 각오하기도 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리쿠의 눈이 제대로 뒤집힌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징계가 확정되는 날까지 그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머리통이 터진 아이들의 부모들은 금방이라도 교무실을 부술 듯 씩씩거리다, 복도와 운동장 CCTV 영상을 확인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화면 속에는 텐무가 리쿠를 향해 야구공을 풀스윙으로 내리꽂는 장면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주지 스님은 그 영상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모리키미 선생님을 향해 깊게 합장했다. 당황한 모리키미 선생님 또한 엉겁결에 마주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하나 더 있었다.
리쿠에게 생긴 결정적인 변화.
(4) 히가시야마 고등학교 전교생이 리쿠가 절에 사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여튼, 그 정도의 소란스러운 변화가 있었다.
*
"너 여기서 뭐 해?"
리쿠는 범종 앞에서 하얀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는 유우시를 보며 물었다. 오늘은 80시간의 사회봉사 중 겨우 20시간째를 채우는 날이었다. 화장실이나 강당 청소 같은 교내 봉사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리쿠는 기를 쓰고 교외 봉사를 택했다. 학교로 돌아가 시시콜콜한 소동에 휘말리는 것보다야 몸이 고된 게 나았다.
다행히 협력 기관 중에는 청공사의 말사인 수정사水精寺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지 스님이 말만 잘 해준다면 열 시간 정도는 슬쩍 가라로 빼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수정사 스님들은 단단히 지령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리쿠를 온종일 지독하게 부려 먹고 있었다. 방금까지도 우물에서 정자까지 지게를 지고 여덟 번을 왕복했다. 나무꾼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지. 그렇게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나시 소매로 벅벅 닦아내고 있는데, 낯익은 뒤태가 리쿠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유우시는 리쿠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황한 리쿠와 달리 이곳에서 리쿠를 마주친 게 별로 놀랍지 않은 기색이었다.
"기도 중이잖아."
"그러니까, 학교에 있을 시간에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봉사하러 왔어."
"네가 무슨 봉사?"
유우시는 대답 대신 시선을 낮췄다. 한참 뒤에야 돌아온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우타하시 나루토랑 싸웠어."
"우타하시랑?"
정자에 걸터앉아 있던 리쿠는 벌떡 일어나 유우시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디 부러진 덴 없는 것 같은데. 나루토가 아무리 정치질로 서열을 잡았다 해도 주먹까지 뒤처지는 놈은 아니었다. 리쿠가 보기에 유우시는 나루토의 정타 한 방이면 그대로 나가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다. 다행히 유우시는 생채기 하나 없이 지나치게 말끔했다.
"안 다친 거야?"
"멀쩡해. 안 다쳤어…. 그러니까 이것 좀 치워줄래?"
제 배 근처를 더듬으며 상태를 살피는 리쿠의 손길에 유우시가 곤란한 듯 말했다. 리쿠는 그제야 머쓱하게 손을 뗐다. 그러니까 유우시의 말을 요약하자면 단순했다. 자신이 우타하시 나루토를 고꾸라뜨렸다는 소리였다. 순간 허언증인가 싶었으나 전력으로 날아오던 야구공을 낚아채던 그 순발력을 떠올리니 아주 거짓말 같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왜 그랬는데?"
리쿠의 물음에 유우시는 입을 닫았다. 발치에 떨어진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다 저 멀리 툭 던졌다. 왜 때렸냐니까? 재차 묻자 유우시가 아주 낮게 웅얼거렸다.
"들으면 기분 나빠할 것 같아...."
"안 나빠해. 말해봐."
유우시는 한참이나 리쿠의 눈을 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절간에 처박혀서 위패만 깎고 있으면 명이 짧아진대. 죽은 사람들 이름만 만지다 보면 팔자도 그렇게 된다고."
그 말을 뱉는 유우시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정작 듣는 리쿠는 덤덤했다.
"그게 끝이야?"
"응."
"야, 뭘 그런 걸로 애를 패고 그래. 너도 은근 성깔 있다?"
난 또 뭐라고. 리쿠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차피 리쿠가 절밥 먹고 사는 건 전교생이 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간 소리일 뿐이었다. 리쿠가 직접 들었어도 콧방귀나 뀌고 넘겼을 거다. 고작 그런 말로 주먹질까지 할 건 또 뭐람. 전학생에게 쏟아지는 우유 곽을 보고 의자를 휘둘렀던 리쿠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때 리쿠는 정말이지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눈앞이 깜깜해졌으니까.
"일찍 죽으면 일찍 죽는 거지, 뭐."
리쿠가 툭 내뱉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정말 리쿠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갑자기 대화가 철학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에에. 그냥 하는 말이잖아. 쪽팔려 죽겠다, 졸려 죽겠다, 그런 거랑 비슷한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다들 말로만 그러는 거지."
그 말을 하고 유우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영적인 의식을 치르는 사람 같았다. 안 그래도 긴 속눈썹이 눈을 감으니 도드라져 보였다.
리쿠도 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으러 평생 신하들을 닦달했고, 이집트인들은 육신을 보존하려 장기까지 다 꺼내 미라를 만들었다. 어떻게든 지속되고 싶어 하는 본능. 대체 이 세상에 뭘 두고 왔길래 그리 떠나지 못하는 걸까.
리쿠라고 딱히 죽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남겨둔 게 별로 없어서 그렇다. 가족도, 제대로 된 친구도 없고, 기껏해야 어렵게 구한 운동화 한 켤레 정도다. 세상이 내일 당장 끝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지는 꽤 되었다. 죽어본 적 없는 열여덟의 허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리쿠는 자신의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므로. 결국 죽음 역시 언젠가 경험해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다음 생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제발 인간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눈을 감은 유우시 옆에서 함께 눈을 감아보았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미래를 그려보려 해도 잡히는 장면이 없었다. 꿈이나 기대되는 내일, 혹은 범종 앞에서 빌고 싶은 소원 같은 것들. 유우시는 그런 게 있는지 꽤 오래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먼저 눈을 뜬 리쿠가 물었다. 유우시는 대답 대신 작은 돌멩이를 집어 저만치 던졌다. 따분한 봉사 시간에 말동무가 생겨 신난 리쿠가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유우시, 이 돌멩이도 전생에는 사람이었을지 몰라. 함부로 던지고 그러면 안 돼. 특히 사찰에 있는 돌은 더더욱."
"진짜?"
유우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강경 공부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었나 보다. 리쿠는 뭔가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기분에 신이 나서 설명을 보탰다.
"진짜라니까. 불교에는 윤회라는 게 있거든. 죽으면 자기가 지은 업보에 따라 여섯 가지 세상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너도 조심 안 하면 다음 생엔 저런 돌멩이로 태어날걸?"
유우시는 꽤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죽고 나서 얼마나 있다가 다시 태어나는데?"
"음... 보통 사십구재라고 하잖아. 죽고 나서 딱 49일 동안 어디로 갈지 심사를 받는 거야. 그 기간을 중음이라고 하는데, 그때 판결이 나는 거지."
리쿠는 유우시의 콧등을 툭 쳤다. 잘생긴 이케멘으로 태어날지, 아니면 방금 네가 던진 돌멩이로 태어날지 같은 거. 리쿠는 이케멘이라는 대목에서 보란 듯이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유우시는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떻게 해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착하게 살면 전생을 기억하는 게 가능한지. 일본인은 다시 태어나도 꼭 일본인이어야 하는지. 혹은 너무 많이 환생해서 더는 태어날 몸이 없는 사람도 있는지 같은 것들. 하지만 유우시는 더 묻지 않고 리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물어봐야 리쿠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마에다 리쿠가 아는 밑천은 딱 여기까지니까.
멀리서 묘진 스님이 리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어요! 금방 가요!"
리쿠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유우시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툭 치고는 대웅전 쪽으로 잽싸게 뛰어가는 뒷모습이 가벼웠다.
유우시는 리쿠가 떠나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수정사. 이름 그대로 물 수에 맑을 정을 써서 맑은 물이 흐르는 절이라는 뜻이다. 8세기 무렵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이 사찰은 교토 내에서도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북쪽 산세가 완만하고 앞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흘러 배산임수의 명당이었다.
그리고 유우시가 직접 겪어본 교토는 과거와 미래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곳이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붉은 토리이 행렬과, 그 아래 낮은 처마 밑에서 소박하게 팔리고 있는 오마모리들. 대물림된 가업을 묵묵히 지키는 굽은 허리의 노인들과, 그들이 빚어낸 전통을 신기한 듯 구경하며 지나가는 교복 입은 학생들. 794년 헤이안쿄가 세워진 이래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의 중심을 지켰던 이 도시는,
ㅡ 마치 세상의 모든 인연과 연줄이 거미줄처럼 얽힌 채 그대로 멈춰버린 거대한 태엽 시계 같다.
지심귀명례. 나무.
그리고 리쿠는 이 정체된 도시의 공기와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지심귀명례. 나무.
낡은 사찰의 단청색을 닮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지심귀명례. 나무.
유우시는 두 시간을 내내 기도했지만 다시 몸을 굽혔다.
지심귀명례. 나무.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절했다.
지심귀명례. 나무.
[2025 개정판] 고등학교 현대 사회와 안전 윤리
단원 3. 공동체의 해체와 무동기 범죄의 사회적 파장
"증오 범죄의 비극: 2006년 교토 히가시야마고 묻지마 살인 사건"
21세기 초 일본 사회를 뒤흔든 대표적인 무차별 살상 사건으로, 당시 히가시야마 고교 재학생이었던 마에다 군이 희생되었다.
본 사건은 교토 안전 구역이라 불리던 히가시야마 지구의 신화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일본 전역의 학교 정문 CCTV 설치 의무화 및 지역 밀착형 방범 체계(패트롤) 구축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희생된 마에다 군은 평소 품행이 바르고 인근 사찰의 일을 돕던 성실한 학생으로 알려져 지역 사회에 더욱 큰 슬픔을 안겼다.
지심귀명례. 나무.
下
2026.02.27.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닌데 전학을 온 뒤로는 자꾸만 꿈을 꾼다.
문제는 꿈을 꾸었다는 기분만 남는다는 거다.
눈을 뜨면 내용은 전부 사라진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히 안다.
나는 밤마다 무언가를 보고 있다.
시험 기간이라 예민해서 그런 걸까?
2026.03.01.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고양이를 봤다. 길고양이치곤 조금 뚱뚱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내 앞을 느릿느릿 가로질러 사라졌다.
2026.03.14.
처음으로 눈을 뜬 뒤에도 꿈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내 또래쯤 되는 남자애가 나왔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뒤통수가 까맸던 것 같다.
그 애가 나를 불렀다.
유우시.
내 이름을 아는 목소리였다.
2026.03.21.
소름 돋는 사실을 알아냈다. 학교에서 잠을 잘 때만 꿈이 기억난다는 거다.
그래서 오늘 사회 시간에는 수업도 듣지 않고 일부러 엎드려 잤다.
그 애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전학 온 학교에는 아직 친구가 없다.
이동수업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나를 깨워 주지 않는다.
2026.03.23.
저번에 봤던 고양이는 근처 사찰에서 키우는 고양이라고 한다. 어쩐지 길고양이답지 않게 태평해 보였다.
2026.03.30.
학교에서 안전 교육을 했다.
이맘때가 되면 교토의 학교들은 늘 같은 교육을 한다고 했다.
20년 전 그 사건 때문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너무 지루했다.
이건 어차피 나만 보는 일기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다.
2026.04.03.
요즘은 꿈을 꾸지 않는다.
어쩌면 여전히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학교에서 다시 자 볼 생각이다.
*
눈을 뜨니 눈앞에 리쿠가 있었다. 유우시, 너 1교시부터 지금까지 잤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창밖 햇빛이 이미 교실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벌써 3교시가 끝난 뒤였다.
"요즘 밤에 못 자?"
그렇게 말하고 리쿠는 아무렇지 않게 옆자리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셔츠를 쑥 벗어 올리자 까만 맨살이 드러났다. 어깨와 잔근육이 유우시의 눈앞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 왜 내 앞에서 갈아입어. 유우시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리쿠는 황당해했다. 에? 그럼 뭐 여자애들이랑 같이 화장실 가서 갈아입어? 리쿠는 귀 끝까지 붉어진 유우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유우시는 괜히 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요즘따라 붙어 다니는 둘을 교실 뒤편의 무리가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아마 한 반에 왕따는 하나만 두었던 이유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제일 만만하던 둘이 서로 손을 잡아버리면 더는 예전처럼 건드리기 어려워지니까.
봉사 시간 80시간을 함께 채우는 동안, 리쿠와 유우시는 어느새 단짝 비슷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사실 정말 친한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애매했다. 다만 이 반에서 서로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과녁이 될 수 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유우시가 진짜로 80시간을 다 채웠는지도 의문이었다. 멀뚱히 앉아 있다가 리쿠가 끝날 시간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같이 절을 빠져나오곤 했으니까.
체육 시간, 운동장 한쪽에서 리쿠가 농구공을 튀겼다. 멈추지 않고 오십 번 드리블하면 끝나는 수행평가였다. 리쿠는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라며 공을 툭툭 바닥에 내리쳤다. 공이 손바닥과 땅바닥 사이를 경쾌하게 오갈 때마다 마른 흙먼지가 올라왔다.
"유우시, 너도 얼른 해. 빨리 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리쿠."
"응?"
"오늘이 며칠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리쿠는 공을 튀기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6월 19일이지."
"몇 년도?"
"에."
리쿠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유우시를 쳐다봤다. 유우시, 너 또 장난치려고 그러지. 이번엔 부히히 웃어도 안 봐준다? 리쿠가 그렇게 말하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유우시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리쿠의 손에서 공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대답해 줘. 오늘이 몇 년도야? 단호한 목소리였다. 리쿠는 당황한 얼굴로 유우시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왜 그래.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2006년이잖아.
2006년 6월 19일.
*
"나도 리쿠가 사는 청공사에 가 보고 싶어."
정문을 룰루랄라 지나던 리쿠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청공사에는 갑자기 왜? 그냥 만화방이나 가자. 오늘 나루토 전권 다 풀린다고 했어. 지금 가야 안 뺏겨. 하지만 유우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청공사에 가 보고 싶어."
청공사에 가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꿈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꾸는 동안에는 이게 꿈인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으니까. 그러나 전학 첫날 리쿠와 눈이 마주쳤을 때. 리쿠를 향해 날아오던 공을 잡아낸 손바닥이 오래 욱신거렸을 때. 흩날리는 바람 사이에서 부처님 앞에 두 손을 모았을 때. 그 모든 감각이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다. 이렇게 아플 리가 없다. 리쿠를 본 순간 유우시는 알 수 있었다. 이 학교 정문 앞에 서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을 때 찾아왔던 그 완벽한 직감.
사찰에 살던, 심성 바른 어떤 학생. 그 아이가 바로 리쿠라는 것을.
일본의 중심지에 빌딩이 솟고 열차와 도로가 깔리는 동안 이곳 교토는 스무 해가 지나도록 그대로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지금이 2006년인지 2026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그래. 가고 싶으면 가자."
잠시 고민하던 리쿠가 말했다.
"대신 촌스럽다고 뭐라고 하면 안 돼."
리쿠는 유우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교토는 아직 죽기에는 너무 맑은 한 남자아이가 살아 있는 곳이었다.
2006년 6월 28일. 이 정문 앞에서 마에다 리쿠는 정신 이상을 주장하는 괴한에게 찔려 죽는다. 칼이 들어간 자리는 심장에서 채 1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칼을 들고 학교 안으로 숨어들려던 괴한은 리쿠와 몸싸움을 벌이다 끝내 교문을 넘지 못했다. 당시 정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경비는 교감실에서 교사들과 간담회 중이었다. 치사량이 넘는 피를 흘리며 아스팔트에 쓰러진 마에다 리쿠의 죽음은, 평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교토 히가시야마고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왜 그런 일을 벌였느냐는 질문에 괴한은 인생이 너무나 무료했다고 말했다. 더 물어보면 너희도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 충격적인 대답과 함께 이 사건에 묻지마 살인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유 없는 증오, 설명할 수 없는 폭력,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재난이라는 뜻으로.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 애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늘 조심해야 한다고. 아무도 왜 학교의 어른들이 제 자리에 없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리쿠가 청공사에 도착하자 치넨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그러다 리쿠의 옆에 낯선 얼굴이 서 있는 걸 보고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인사해. 내 친구 유우시야. 유우시, 너도 인사해. 리쿠는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가리키며 웃었다. 얘는 치넨. 우리 절에서 수행 중이야. 동자승이라고 하려다 리쿠는 괜히 말을 바꿨다.
치넨은 리쿠와 키는 비슷했지만 어딘가 더 어려 보였다. 얼굴선도 둥글고, 몸집도 리쿠보다 한참 작았다. 늘 절 안에서만 지내서 그런가 싶었다. 그것과 체구가 무슨 상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풀만 먹고 자라서 그런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유우시가 치넨을 살피고 있던 만큼, 치넨 역시 유우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그 노골적인 시선에 리쿠마저 불편해졌는지 얼른 둘 사이에 농담을 던졌다.
"치넨! 유우시 완전 도쿄 도련님 같지? 진짜 도쿄에서 왔다?"
"도쿄?"
치넨이 천천히 유우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
치넨은 눈을 부릅뜨고 유우시를 노려보았다.
"……"
치넨. 그때 멀리서 주지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다가온 주지 스님은 리쿠와 유우시, 그리고 치넨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치넨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님이 왔구나."
주지 스님은 느긋하게 웃으며 유우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치넨이 아직 손님 응대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리쿠 친구라면 푹 쉬다 가거라. 공양간에 가면 밥도 있고 과일도 있을 게다. 에이, 이미 다 먹고 왔어요. 리쿠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잠깐 절 구경만 시켜 주고 갈게요. 그러고는 유우시만 보이는 각도로 입술을 오물거리며 속삭였다. 맛없어, 맛없어.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유우시는 리쿠의 끌끌거리는 표정에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서는 치넨이 여전히 커다란 눈으로 유우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볼 거 없지?"
리쿠는 유우시를 뒤에 두고 물가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만 지나면 다 본 거야. 원래 저기 맨뒤에 큰 법당이 하나 더 있는데, 곧 예불 시간이라 아마 못 들어갈걸.
볼 것 없다는 리쿠의 말과 달리, 유우시는 절 구석구석을 천천히 눈에 담고 있었다. 축축한 흙 냄새와 얕은 시냇물 냄새. 지나가는 어른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은 채 걸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잡초가 뽑히지 않은 채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고 돌 틈마다 이름 모를 풀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채 시간이 그대로 쌓여 있는 곳 같았다.
"리쿠는 절이 싫어?"
유우시가 묻자, 리쿠는 앞서가다 말고 커다란 돌 위에 털썩 올라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유우시가 말없이 곁에 앉았다. 따분하고 재미없어. 리쿠는 시냇가를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자갈을 굴렸다. 여기서 살면 인생이 다 정해져 있잖아.
"인생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치넨처럼 불경 배우고 수행해야 돼. 머리도 빡빡이로 밀어야 하고. 대학도 못 가."
"그렇구나……"
리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우시는 대학 갈 거지? 나도 유우시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리쿠 공부 못하잖아."
유우시가 태연하게 말하자 리쿠가 미간을 구기며 돌아봤다.
"에? 너 못하는 말이 없어?"
"농담이야."
"하여튼 나는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
"……."
"나는 뭐든 잘하잖아. 분명 절이 아니라 어디서든 잘할 거란 말이야."
유우시는 리쿠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맞아. 리쿠는 분명 멋있게 살 거야."
"그치? 그렇다니까."
금세 기분이 풀린 리쿠가 웃었다.
"나중에 동창회 같은 데 가면 나루토 같은 놈들은 내가 다 밟아버리는 거지. 그때 내가 유우시도 지켜줄게. 어때?"
"…좋아. 내가 한 번 리쿠 도와줬으니까."
"뭐. 언제?"
"공 잡아 줬던 거 기억 안 나?"
되게 무심하게 도와주더니 은근 지금까지 갖고 있었나 보다. 리쿠가 피식 웃었다.
"그래, 맞아. 유우시 아니었으면 그때 얼굴 맞고 이 잘생긴 얼굴 평생 끝났을지도 몰라."
리쿠는 제 턱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내가 나중에 연예인 같은 거 되면 반 정도는 유우시 덕분도 있겠다."
내리쬐는 햇빛에 리쿠가 눈을 가늘게 찡그리더니 이마 위로 손차양을 만들었다. 유월의 볕은 한여름처럼 살을 태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만히 맞고 있으면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뜨거움이 있었다. 리쿠는 남은 한 손을 들어 이번에는 유우시의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나는 타도 티 안 나. 너 같은 애가 진짜 잘 가려야 되는 거야."
유우시는 말없이 리쿠를 바라보았다.
유우시가 본 리쿠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내일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의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 리쿠에게 리쿠의 미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없어도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뿐, 단 한 번도 정말로 없을 거라 믿어본 적은 없는 사람처럼.
리쿠는 뭐든 될 수 있었다. 어떤 멋진 어른이든.
연예인이 될 수도 있고, 요즘 재미있게 본다던 배구 선수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퇴근길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평범한 회사원이 될 수도 있었다. 유우시는 제 얼굴 위에 드리워진 리쿠의 손을 천천히 내려 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가락 사이를 얽어 깍지를 꼈다. 리쿠의 손은 유우시보다 훨씬 뜨겁고 습했다.
갑작스러운 유우시의 행동에 리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응?"
"그냥. 잡고 싶었어."
유우시는 얽힌 손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리쿠가 사는 절도 좋고, 날씨도 좋아서."
리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작게 끄덕였다.
"나도 좋아."
"뭐가?"
"유우시처럼 말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리쿠는 괜히 먼 산을 보는 척하며 중얼거렸다.
"유우시가 우리 학교로 와서 다행이야."
그때 멀리서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리쿠가 자주 본다던 나비였다. 리쿠는 돌 위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큰 동작이면 놀라 달아날 법도 한데 나비는 리쿠를 알아본 듯 꼬리를 세운 채 쫄래쫄래 앞으로 걸어왔다. 순하지? 저기 뒷산에 사는 고양이인데 가끔 여기까지 와. 리쿠는 쪼그려 앉아 나비의 턱밑을 긁어 주었다. 나 보러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낯익은 하얀 얼룩이 군데군데 번진 노란 고양이였다. 귀엽게 생겼네. 유우시가 말하자 리쿠가 금세 맞장구쳤다. 하는 짓도 귀여워.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청공사에서 새롭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정말 평범한 절이었다. 스님들은 친절했고, 유우시 같은 외부인들도 자연스럽게 찾아와 참배를 하고 돌아갔다. 향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고, 마당에는 바람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만 잔잔했다. 청공사에 와서도 리쿠의 죽음에 대해 유우시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뉴스라도 찾아볼 걸 그랬다. 그랬다면 리쿠에 대한 정보가 조금쯤은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한 장이라도, 사건 당일의 동선이라도, 누가 마지막으로 리쿠를 봤는지 같은 것들.
하지만 지금 유우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2006년 6월 28일. 그날만큼은 리쿠를 히가시야마고 정문 앞에 절대 두지 않는 것. 학교를 못 가게 하든, 교실 안에 붙잡아 두든, 억지로라도 다른 곳으로 끌고 가든. 어떻게 해서든 그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에만 두지 않으면 된다. 그럼 리쿠는 살 수 있다.
하늘 위로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집에 갈 시간이었다. 유우시는 법당 마루 끝에 앉아 신발을 구겨 신었다. 그 모습을 보던 리쿠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건 무슨 신발이야? 나이키 맞아? 처음 보는 건데."
2018년 출시 모델이었다. 그러네. 리쿠는 이 덩크화가 세상에 나오는 해를 아직 살아보지 못한 것이다.
"모르겠어. 빈티지 같은 건가 봐. 예전에 부모님이 사 왔어."
"오. 빈티지."
리쿠가 감탄한 듯 눈을 반짝였다.
"좀 간지나는데?"
그러고는 제 발을 까딱까딱 흔들며 내밀었다.
"내 신발 어때."
맥스 95였다. 2026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오래된 디자인. 하지만 지금 리쿠에게는 가장 최신의, 가장 멋진 운동화일 것이다. 신발을 가만히 바라보는 유우시의 시선에 리쿠는 신이 나서 말했다.
"이게 내 보물 1호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는."
"2호는?"
"2호?"
리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리쿠가 몸을 일으켜 석양을 등지고 섰다. 붉은 빛이 어깨와 머리칼 가장자리에 얇게 걸렸다. 그리고 빛을 가로질러 유우시를 내려다보았다.
"너 시켜 줄까?"
"……."
"그래. 2호는 유우시, 너 시켜 줄게."
리쿠는 제 운동화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얘는 내가 처음 산 운동화고."
이번에는 유우시를 손가락으로 툭 가리켰다.
"너는 내가 처음 사귄 친구니까."
잠시 뜸을 들인 뒤,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처음 우리 집에 초대한 애이기도 하고."
리쿠는 씩 웃었다.
"그러니까 너는 2호인 거야. 마음에 들어?"
유우시는 대답이 늦었다.
"……마음에 들어."
"영광인 줄 알아야 돼."
리쿠가 으스대듯 턱을 치켜들었다. 노을빛 아래서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유우시는 슬슬 헷갈렸다. 이 순간이 정말 꿈인 걸까. 어쩌면 여기가 진짜이고 2026년이야말로 길고 이상한 꿈이었을지도 몰랐다.
하루가 지날수록 이 세계는 지나치게 자연스럽게 유우시의 몸에 스며들었다. 리쿠와 함께 가는 만화방, 만화방 앞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아 먹는 오렌지맛 슬러시, 심지어 유우시가 눈에 띌 때마다 슬금슬금 시비를 걸어오는 남자 무리들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살아 온 유우시의 일상 같았다. 반대로 2026년은 점점 희미해졌다. 거기서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무슨 밥을 먹었고, 누구 앞에서 이렇게 웃었더라. 무엇을 보며 영원을 믿었더라. 아무것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유우시가 질질 끌고 다니는 이 세계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운동화 한 켤레만이, 자신이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신히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유우시! 오늘 점심 딸기우유야! 내가 일부러 안 먹고 두 개 챙겨왔다?"
리쿠는 너무나 현실 같았다.
유우시가 먼저 리쿠의 손을 잡기 시작한 뒤부터는, 오히려 리쿠 쪽이 더 거리낌 없이 몸을 붙여 왔다. 어깨에 팔을 걸치거나, 손가락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얽어 깍지를 끼거나, 유우시의 말랑한 볼을 잡아 늘이며 장난을 치는 식이었다.
또, 리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우시 쪽으로 몸을 기댔다. 햇볕에 달궈진 팔뚝이 가볍게 닿았다.
"유우시."
"응?"
"너는 내가 싫어?"
"갑자기 왜?"
"아니. 싫으면 이렇게 안 할 텐데 싶어서."
리쿠는 말끝을 흐리며 유우시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유우시는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리쿠는 금세 웃었다.
"너 내 생일 때 뭐 줄 거야?"
리쿠가 맞잡은 손을 제 볼에 갖다 대며 말했다.
"생일? 리쿠 생일이 언젠데?"
"6월 28일."
6월 28일?
그 말에 유우시가 천천히 리쿠를 돌아보았다.
"리쿠 생일이 6월 28일이야? 2006년 6월 28일?"
"2006년 6월 28일이 뭐야. 하여튼 6월 28일은 맞아. 내가 절에 버려진 날이 그날이거든."
"...."
"왜 그렇게 놀라. 내 생일이 6월 28일이면 안 되는 거야?"
...리쿠는 생일에 죽었구나.
그런 건 교과서에도, 매년 하던 안전 교육에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죽은 아이에게 그날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남겨진 사람들에겐 아무 쓸모 없는 정보였을 테니까.
"원래 내 생일은 그냥 넘기거든. 버려진 날을 생일이라 하는 것도 좀 웃기잖아."
"......."
"근데 이번엔 좀 다를 것 같아. 유우시가 있으니까."
"갖고 싶은 거 있어?"
"갖고 싶은 건 없고."
"그럼?"
"가고 싶은 데는 있어."
리쿠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지에서 하는 수등공양회(水燈供養會) 알아?"
"수등공양회?"
"응. 강에 등 띄우는 행사."
리쿠는 손바닥으로 허공에 둥근 등을 그리듯 움직였다.
"밤 되면 강 위에 불빛이 쫙 뜬다는데 완전 예쁘대. 치넨이 어릴 때 한 번 갔다 왔는데, 귀신도 같이 구경 온다고 겁줬어."
"귀신은 무슨."
"진짜라니까. 나 거기 꼭 가 보고 싶었어. 생일날 가면 좀 그럴듯하잖아? 나도 누가 태어난 날 축하해 주는 기분 들 것 같고. 먹을 것도 엄청 많아."
유우시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같이 가자."
"진짜?"
"응."
리쿠는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래. 그날 리쿠를 학교 정문 앞이 아니라, 사람들로 붐비는 다른 곳에 데려다 놓으면 된다. 강 위에 등을 띄우는 밤까지 무사히 데려가면.
그러면 이번에는,
이번에는 리쿠가 살 수도 있다고.
친구와 함께 보내는 첫 생일을 웃으며 끝낼 수도 있을 거라고. 촛불 대신 강물 위에 흔들리는 등을 바라보며 자기가 태어난 날에 대해 처음으로 좋은 기억 하나쯤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다음날 아침에도. 법당 마룻바닥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가 치넨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투덜거리며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늘 하던 불평을 중얼거리며 위패 앞에 털썩 주저앉을 거라고. 낡은 운동화를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가 학교에 늦었다며 뛰어갈 거라고. 점심시간엔 딸기우유를 두 개 챙겨 와 하나를 유우시 책상 위에 던져둘 리쿠.
그 이후의 6월도, 7월도.
무덥고 지루한 여름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방학도, 언젠가 어른이 되는 날까지도.
리쿠에게는 당연하게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
2006/06/28 15:00
딱 한 시간만 버티면 된다. 지금처럼 네 시에도 리쿠가 유우시의 옆에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다.
유우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쿠는 들뜬 얼굴로 축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수등공양회는 본래 죽은 이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비는 불교 행사였다. 지금은 그 뜻이 많이 옅어져 아이들 손을 잡은 가족들이 놀러 오는 지역 축제에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본래의 의미까지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듯했다.
아이들을 위한 작은 법회가 열리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체험 부스가 줄지어 있었다. 강가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주먹밥과 당고, 야키소바를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냄새를 풍겼다. 몇몇 아이들은 금붕어 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튀겼다. 연인들은 나무 패에 서로 이름을 적어 매달고 있었다. 리쿠는 그런 것마다 빠짐없이 관심을 보였다.
"유우시, 우리도 저거 하자. 등 만들기."
"아까 했잖아."
"그건 소원 등 아니고 그냥 날리는 거였잖아. 저건 소원 비는 거야."
리쿠는 뻔뻔하게 웃으며 유우시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목에 닿는 체온이 뜨거웠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느라 리쿠의 머리칼 끝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유우시는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느리게 갔다.
"유우시."
"응?"
"너 오늘 왜 이렇게 자꾸 시계 봐?"
리쿠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집에 일 있어?"
"아니."
"그럼 배 아파?"
"아니라니까."
"그럼 나랑 노는 게 재미없어?"
리쿠는 일부러 서운한 척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재미없는 거 아니지? 유우시는 리쿠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리쿠는 금세 웃었다. 그럼 됐어. 세 시 사십 분. 강 위에는 아직 띄우지 않은 등이 줄지어 모여 있었다. 해가 기울며 물빛이 금색으로 번졌다. 유우시는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나면 된다. 네 시만 넘기면 리쿠는 산다.
리쿠와 유우시가 나란히 앉아 다 접은 등에 소원을 적었다. 뭐라고 적을 거야? 유우시가 물었다. 아직 다 안 적었어. 리쿠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유우시를 돌아보았다.
"유우시, 우리 각자한테 바라는 소원 적어 주는 건 어때?"
"각자 소원?"
"응. 그러니까 나는 유우시를 위해 비는 소원을 적을게. 유우시는 나를 위해 빌어 주는 거야. 대신 무슨 소원인지는 비밀. 어때?"
유우시는 잠시 리쿠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유우시는 천 조각을 조심스럽게 펼쳐 네임펜을 들었다. 너무 세게 누르면 찢어진다고 했으니까 힘을 빼고 천천히 눌러 써야 했다. 리쿠를 위해 빌 수 있는 소원은 하나뿐이었다.
리쿠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짧은 문장을 다 적고 나니 리쿠는 자기도 다 썼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우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강가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석양빛이 번진 강물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먼저 띄워 보낸 수많은 등들이 물 위와 하늘 사이를 함께 떠다니며 흔들렸다. 강가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도 주황빛이 번졌다.
"유우시, 이제 날리는 거야."
리쿠가 등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웃었다.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두 개의 등이 동시에 손을 떠났다. 하나는 리쿠의 것, 하나는 유우시의 것. 두 소년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등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위로 솟았다.
등이 멀어지자 리쿠는 얼른 두 손을 모았다.
"지금 딱 합장해야 효과 좋을 것 같아."
"뭐라고 적었길래?"
유우시가 묻자 리쿠는 눈만 접어 웃었다.
"에이, 그건 비밀이라니까."
두 사람의 등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불빛 사이로 섞여 들어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의 것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였다.
"야, 방금 식당에서 뉴스 봤어?"
옆에 있던 여자 둘이 수군거렸다. 히가시야마고 앞에서 칼부림 났대. 유우시는 눈을 번뜩 뜨고 시계를 봤다. 등을 날리는 사이 시간은 네 시를 넘어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우시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리쿠를 찾았다. 마에다 리쿠는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길바닥에 쓰러지지 않은 채, 뜨거운 체온을 그대로 지닌 채 유우시 앞에.
"리쿠…."
"방금 뭐야? 우리 학교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리쿠는 신경 쓰지 마."
유우시는 그대로 리쿠에게 안겨 들었다. 갑자기 품 안으로 파고드는 유우시에 리쿠는 놀란 듯 어깨를 굳혔다.
"유우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 진짜 오늘따라 왜 그래. 어디 아픈데 나온 거야?"
리쿠의 품 안은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정말 살아 있었다. 리쿠가 죽지 않은 거다.
유우시가 이곳에 와서 할 일은 이거였던 거다.
이 시절의 리쿠를 살리는 것.
잠시 뒤 주변 사람들의 말과 속보를 통해 사건의 전말이 조금씩 전해졌다. 운이 좋게도 히가시야마고 앞에 있던 괴한은 지나가던 남자 시민 셋에게 붙잡혔다고 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놀라 달려온 경비 아저씨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괴한은 그대로 연행되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구경을 마치고 규동집 구석 자리에 앉은 리쿠와 유우시는 매장 한쪽에 걸린 낡은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2006년의 휴대폰으로는 이런 소식을 곧바로 알 수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리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날 학교 빠진 게 완전 럭키긴 한데.... 우물우물 씹던 입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 칼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진짜 애들 찌르고 막 그랬으면."
"저런 사람 봤으면 어떻게 했을 거야?"
유우시가 물었다.
"얼른 도망가야지."
"안 붙잡고?"
"야, 무조건 나부터 살고 봐야지. 너도 저런 사람 보면 무조건 도망가. 유우시 너는 특히 더. 공놀이 잘하는 거랑 실전 싸움은 완전 달라."
거짓말. 유우시는 생각했다.
도망치지 못했으면서. 자기만 피하지 못했으면서. 리쿠는 바보고 거짓말쟁이었다. 리쿠, 너는 저 사람을 봤다면 네가 몸으로 막았을 거야. 너를 그렇게 괴롭혔던 학교 안의 애들을 지키려고 칼 든 사람이랑 싸웠을 거야. 무서운 줄도 모르고. 죽을 수도 있는데. 너는 너무 착해서.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그래도 살아서 정말 다행이야,
*
"데려다줄게."
리쿠가 말했다. 오늘 나 때문에 하루 종일 시간 쓴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유우시 데려다줄게. 늦기도 했고. 시간을 보니 벌써 열한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리쿠의 생일까지 딱 한 시간 남아 있었다.
유우시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제 리쿠를 못 볼 것 같다는 예감. 내가 계속해서 꿈에서 어떤 남자아이를 보고,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꾸고, 결국 여기까지 와 리쿠를 만난 건 전부 2006년의 리쿠를 살려 내기 위해서니까. 리쿠를 살렸으니 나는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평생 이곳에 살 수는 없잖아. 오늘 리쿠와 이 밤거리를 다 걷고 다시 눈을 감으면 리쿠가 없어질 것 같아서. 유우시는 조금만 더 있자는 리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리 조금만 더 걷자."
리쿠와 유우시는 조용히 걸었다. 가로등 몇 개를 빼면 아무 불빛도 없었고, 세상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발밑 자갈 밟히는 소리와 두 사람의 발걸음만 밤길 위에 남아 있었다.
"유우시, 안 무서워?"
리쿠가 물었다.
"안 무서워. 이런 게 뭐가 무서워. 내가 여자애야?"
그 말에 리쿠가 작게 웃었다.
"아니지. 여자애 아니지. 근데 여자애만 무서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리쿠는 그렇게 말하며 유우시의 손을 다시 덥석 잡았다. 이제는 이 정도 스킨십쯤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한참 말없이 걷던 리쿠가 문득 물었다.
"근데 유우시는 원래 친구들이랑 손 잡아?"
"응?"
"유우시가 내 손 먼저 잡았었잖아. 되게 자연스럽길래."
"음...."
"이런 질문 좀 이상한가…."
리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나도 친구 없어."
"응?"
"나도 친구 없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손 잡는 것도 리쿠가 처음이야."
"전학 오기 전에도 없었어? 도쿄에도?"
"응. 없었어. 맨날 혼자 있었어."
리쿠는 그 말에 잠시 조용해졌다가, 붙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그럼 우리는 다 서로가 처음인 거네."
"응...."
"유우시, 나랑 앞으로 재미있는 거 많이 하자. 만화방도 가고, 나중에 네가 살던 도쿄도 가 보고. 오늘처럼 축제도 또 오고. 어때?"
"…좋아. 정말 좋아."
유우시는 생각했다. 리쿠랑 있는 게 정말 좋다고. 리쿠는 늘 쉽게 들뜨고, 속이 훤히 보일 만큼 솔직했고, 웃을 때면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유우시를 기쁜 얼굴로 바라봐 주었다. 리쿠 같은 사람은 아마 리쿠밖에 없을 거라고.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리쿠 같은 사람은 정말 리쿠밖에 없을 거라고. 그 어떤 시대에서도 유우시는 리쿠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이제 헤어지자."
유우시가 말했다.
"알았어. 먼저 가. 너 가는 거 보고 나도 갈게."
그 순간, 골목 어귀에서 짧은 비명 소리가 터졌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불 꺼진 편의점 앞 자전거 거치대가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도로에서 헤드라이트 하나가 미친 듯 흔들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오토바이가 인도를 스칠 만큼 위험하게 붙어 오고 있었다. 조용한 밤길 위로 엔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유우시는 몸이 먼저 굳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일어나면 전부 잊어버리던 꿈. 기억나지 않는 줄만 알았던 수많은 밤의 잔상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듯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울고 있는 아이, 비틀거리는 헤드라이트, 차가운 골목 바닥, 그리고,
리쿠.
유우시는 이 장면을 꿈에서 본 적 있었다.
안 돼. 리쿠.
그 자각보다도 리쿠는 빨랐다.
"야!"
리쿠가 뛰어나갔다. 망설임이 없었다. 아이의 겨드랑이를 끌어안듯 잡아당겨 인도 안쪽으로 밀쳤다. 동시에 방향을 틀지 못한 오토바이가 그대로 리쿠를 들이받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람 몸이 허공에 뜨는 걸 유우시는 그날 처음 봤다. 시간이 찢어진 듯 느리게 흘렀다. 리쿠의 손이 공중에서 한 번 허우적거렸다. 오토바이는 바닥을 긁으며 넘어졌다. 쇳소리와 비명, 깨지는 플라스틱 소리.
*
"얘, 일어나."
반장이었다.
"너 아까 3교시부터 지금까지 잔 거 알아? 우리 이제 청소하고 집 가야 돼."
유우시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3교시부터 지금까지 잤다고? 다섯 시간 넘게 잤다는 거잖아. 믿기지 않았지만 옆 분단 아이들은 이미 하나둘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유우시가 안고 자던 사회책은 침에 젖어 한쪽 페이지가 번져 있었다.
"너 진짜 잘 잔다. 아무리 안 깨웠다고 해도 점심까지 안 먹고 자는 애는 처음 봐."
반장은 신기함 반, 한심함 반인 얼굴로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교탁 앞으로 가 애들을 정리했다. 유우시는 머리를 긁적이며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를 꺼냈다. 그러게, 어떻게 한 번도 안 깼지.
빨간 빗자루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는데 기분이 묘했다. 교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전학 온 지도 벌써 한 달은 넘었는데 아직 적응을 못 한 건가. 책상 배열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도, 칠판 위 낙서 자국도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보였다. 대충 교실 반쯤을 쓸었을 때 반장이 이제 가 봐도 된다며 턱짓했다. 유우시는 말없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왔다. 복도와 계단에는 학생들이 몰려 있었고, 교문 앞에선 다들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떠들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우시는 한 달째 아무와도 친해지지 못했다. 평소에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조금 외로웠다. 아무래도 생일이라 더 그런가 싶었다. 오늘은 2026년 4월 5일, 유우시의 생일이었다. 그래도 집에 가면 엄마가 해 둔 야키니쿠가 있을 터였다. 친구 없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기죽을 것도 없지. 유우시는 일부러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이어진 길에는 사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교토의 풍경은 여전히 유우시에게 낯설고 신기했다. 길가에 앉아 오마모리를 파는 노인들, 그 곁을 조용히 지나가는 승려들, 향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는 오래된 문들. 유우시는 한 달째 그 거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번 두리번거리곤 했다.
오늘은 유독 사람이 많았다. 유우시는 집으로 가다 말고 목을 길게 뺐다. 앞쪽에 키 큰 어른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 북적이는 중심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데 하나도 안 보여…."
작게 중얼거린 순간, 바로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미즈코쿠요우가 있는 날이라 사람이 더 많은 거예요."
유우시는 놀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황빛 가사를 두른 젊은 승려 한 명이 옆에 서 있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허리를 세운 자세만큼은 꼿꼿하고 단정했다.
"미즈코쿠요우요?"
유우시가 묻자 승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어나지 못했거나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예요. 부모가 먼저 보내야 했던 아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물과 등을 바치며 기도하지요."
그 승려는 사람들 손에 들린 작은 등을 가리켰다.
"저 불빛들이 그 아이들에게 보내는 길잡이예요."
궤도를 따라 등 몇 개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불빛 하나하나가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마음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불교라는 건 어려운 것투성이였지만, 이렇게 보면 참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부모가 없는 애들은 어떡해요? 그런 애들은 죽어서도 영원히 길을 잃나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유우시도 알 수 없다.
승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 틈 사이로 오르는 등을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꼭 부모의 인연만 인연인 것은 아니지요. 떠나간 사람을 기리는 남아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인연입니다. 혹시 기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유우시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 사람이 있나. 우리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멀쩡히 살아 계신데.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했는데 승려는 말없이 유우시를 바라보았다. 없는 것 같다는 말과 달리 얇은 볼선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또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유우시도 뒤늦게 젖은 감촉을 느꼈는지 놀란 얼굴로 황급히 눈가를 문질렀다.
"에…."
"없더라도 기도하시지요."
승려가 조용히 말했다.
"떠나간 모든 이들을 위해서요."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 앞에 올리고, 허리를 조금 숙여 합장했다. 손끝과 시선이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유우시는 곁눈질로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어설프게 두 손을 모아 따라 했다.
바람이 휙 하고 불었다. 4월의 공기는 아직 봄기운이 선선했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지 않아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법당 사이사이 푸른 나무들도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지심귀명례. 나무."
승려가 읊조렸다.
"지심귀명례. 나무."
유우시가 따라 했다.
"지심귀명례. 나무."
외롭지 않기를.
"지심귀명례. 나무."
아프지 않기를.
그때, 저 뒤로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지나갔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 고양이었다. 유우시는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짧게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녀석을 가리켰다.
"저 고양이를 아세요?"
승려가 물었다.
"가끔 집에 갈 때마다 봤어요. 사찰에서 키우는 고양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저희 사찰에서 지내는 아이입니다."
"헐."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놀러 오세요."
그 말에 유우시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 사찰인데요?"
"수정사라고, 청공사의 말사입니다. 저 골목만 돌아 곧장 올라오면 나와요. 손님이니 제 이름을 말하고 오시면 다들 반겨 주실 겁니다."
승려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치넨입니다."
"네. 기억했어요."
유우시는 그렇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우시 군."
"네?"
돌아보자 치넨이 잠시 말없이 유우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가며 승복 자락 끝을 흔들었다.
"......행복해야 합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유우시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요."
유우시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길을 걸었다. 내가 그렇게 친구 없어 보였나.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심심한 생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언가를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어도 좋았다. 오늘을 여러 날과 똑같이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저녁 바람이 골목 사이를 스쳤다.
사찰의 종소리가 멀리서 한 번 더 울렸다.
오늘은 무슨 꿈을 꾸려나.
나는 요즘 꿈 같은 건 잘 꾸지 않지만.
어쩌면, 여전히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